[차미경의 컬처 토크] 듣지 않는 세상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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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슨’ 스킬 컷. /사진=네이버 포토
▲영화 ‘리슨’ 스킬 컷. /사진=네이버 포토
  • 영화 <리슨(Listen), 2020>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때로는 선의도 폭력이 된다.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무지한 선의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 여기 ‘복지’라는 국가적 선의에 의해 무참히 해체된 가족이 있다.

영화 <리슨>에 등장하는 벨라네가 바로 그 가족이다.

벨라네는 포르투갈에서 영국으로 이주해온 가난한 이주민 노동자 가정이다. 벨라는 실직한 남편과 함께 12살 아들 디에구와 12개월 딸 제시, 그리고 그 터울 사이에 청각장애를 가진 딸 루까지 세 남매를 키운다. 밀린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실직한 남편 조타 대신 벨라가 남의 집 청소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잇지만 가끔 슈퍼에서 생필품을 훔쳐 충당해야 할 만큼 위태로운 형편이다.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듯 의지하고 있는 복지혜택을 행여라도 빼앗기게 될까 봐 벨라네 부부는 늘 불안하다. 그런 그들에게 루의 보청기 고장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손 쓸 수 없이 망가져 버린 보청기는 고칠 수도 없고 너무 비싸 다시 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새로 지원을 신청하는 건 차마 엄두도 안 난다. 지원받은 지 얼마 안 된 보청기를 망가뜨린 부모의 실수를 책잡을까 두려워 벨라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라고 어린 딸 루에게 단단히 일러둔 참이었다.

그러나 고장 난 보청기는 끝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보청기를 망가뜨린 부모의 실수는 아동학대로 오인 되었고 루의 등에 난 알 수 없는 멍은 제대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아동학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아동학대로 부모와 강제 분리된 세 아이들은 보호기관으로 강제 이송되었고 입양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복지국 직원들에게 벨라네 가족은 그저 원칙에 따라 처리할 케이스 중 하나일 뿐, 특별한 상황에 처한 개별적인 인간은 거기에 없다. 벨라네는 복지국에 그저 아이들을 학대하는 가난한 이주민 부류로 간주 될 뿐이며 루 역시 그들에겐 일반적인 학대 피해 아동일 뿐, 아이의 장애나 의견은 고려되지 않는다.

때문에 보호기관에 있는 동안 청각장애가 있는 루에게 수어 조력은 제공되지 않았다.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낯선 곳에서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 고립돼 있는 어린아이의 공포를 그 누구도 공감하거나 배려해 주지 않는다.

어렵게 이루어진 가족 면회에서조차 참관인의 감시가 용이하도록 영어만 사용할 것이 강요된다. 벨라네 가족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나 루와의 소통을 위한 수어 사용은 금지된다. 학대 부모가 그들만 통하는 언어로 아이들에게 부모의 뜻을 강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루는 가족과 만나는 순간에도 수어로 자기의 뜻을 전달할 수 없었다. 잔인한 장면이었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조치에 항의할수록 가족 면접은 즉각 중단되었고 엄마가 흥분할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엄마의 우울증 지수가 높아질수록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양육권 박탈의 조건만 늘어갈 뿐이다. 어린 제시에게 물려야 할 젖은 불대로 불어서 무심히 엄마의 옷 밖으로 흘렀고 이런 상황에 어떻게 엄마가 흥분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을 수 있는지 벨라가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어린 제시는 어린 만큼 빠르게 입양되었고 아들 디에구의 입양도 결정되었다. 오직 오빠만을 의지하고 있던 루만이 보호소에 홀로 남겨졌다. 입양이 이루어진 후엔 부모의 상황이 소위 ‘정상적’인 상황으로 회복된다 해도 아이들은 다시 친부모에게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완벽한 파괴였다!

루는 청각장애를 이유로 어디에도 입양되지 못했다. 루의 몸에 난 알 수 없는 멍은 자색반병이란 질환에 의한 것으로 부모의 학대 때문이 아님은 뒤늦게야 밝혀졌다. 루를 되찾기 위한 재판에서 벨라의 항변은 너무나 절절해서 눈물겹다.

대체 이것이 복지라는 이름의 폭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세상 어디에도 약자를 위한 낙원은 없구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 같은 캔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서 느꼈던 암담함이 이 영화에선 더 절망적으로 가슴을 조여왔다.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선의의 그 어떤 제도와 법도 완전할 수 없다. 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제도와 법이라 해도 그것이 미칠 상황과 현실을 세심히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면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와 무엇이 다른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으로 데려와 쇠 침대에 눕히고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렸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강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말이다.

영화 제목이 ‘리슨(Listen)’이어서 청각장애를 다룬 가족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니 제목의 이유를 너무나 선명히 알겠다. 듣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능이지만 듣지 않는 것은 ‘무능’이란 걸.

이 영화에 등장하는 복지국 관계자들 모두 귀가 없는 괴물들 같았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오로지 명문화된 원칙과 시스템만 상황에 적용할 뿐 그 때문에 한 사람이, 한 가정이 파괴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누구도 벨라네 가족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름하여 사각지대라 일컫는 다수의 이면에 가려진 소수의 그늘을 보려고 하지 않는 무심한 세태가 어디 이 영화뿐이랴. 94%의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율에 도취해 6%의 절박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조롱하는 정치적 목소리가 더 힘을 발휘하는 것이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이니 말이다.

되새겨 보건대 못 듣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안 듣는 것은 무능이다!

선의도 때론 폭력이 될진대 선의조차 없는 무관심은 얼마나 더 심각한 폭력이랴.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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