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장애, 그 허망한 판타지

1
152
▲'장애 판타지'에 주변화된 장애를 가진 사람 ⓒ더인디고 편집
▲'장애 판타지'에 주변화된 장애를 가진 사람 ⓒ더인디고 편집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약속이 있어 나선 길은 제법 호젓하고 여유로웠다. 예약한 장애인콜택시는 의외로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약속 시간보다 20분 남짓 일찌감치 도착해 주변 상가를 둘러보기도 했다. 10년을 넘게 사는 동네 한복판에 이름깨나 날리는 유명 맛집골목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요즘에야 안 덕분에 집 나설 때마다 들러 요즘 말로 핫한 거리 구경 삼매경에 빠질 지경이다.

용리단길이라고 불리는 거리는 용산우체국을 중심으로 삼각지역과 신용산역 사이의 사방으로 이어진 조붓한 옛길이다. 예전 일제 강점기 시절 형성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는 용산의 지역적 특성으로 일본식 다층 구조의 목조건물들을 개조한 가게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다. 차량 두 대가 서로 어슷하게 빗겨 지나가야 할 정도로 비좁은 골목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이나 카페들은 기왕의 건물에 현대식으로 인테리어를 덧입혀 모양새는 양복에 갓 쓴 듯 생뚱맞고 어설프지만 그 어정쩡한 분위기가 레트로 감성을 자극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셈이다. 시대 변화에 늦된 나로서는 기이하고 생경한 풍경이지만, 오히려 그 생경함은 거리 구경에 미숙한 내게는 미지의 ‘판타지’가 되었고 자주 찾는 이유가 된다.

지인을 만나자마자 어김없이 용리단길 초입에서 골목 기행을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기왕에 점 찍어둔 맛집, 그러니까 음식 맛과 가게 분위기로 제법 입소문을 타는 곳인지라 기대감마저 있어 해가 중천인데도 갈 길을 서둘렀다. 쓰러질 듯 기우듬한 가게는 목조 적산가옥에 시멘트를 덧입히고 출입구 여닫이 새시 문을 달았는데 입구에 경사로가 놓였다. 경사로를 타고 의기양양 가게 안으로 들어섰지만 아뿔싸 허사였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는 있지만, 있을 수는 없는 곳이었다. 통로에서 식탁이 놓인 실내 사이가 30센티 높이 남짓한 단차로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 낮은 단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맛집을 나왔다. 북적대는 맛집, 들어갈 수는 있으되 머무를 수는 없는 곳에서 당황한 사람은 휠체어를 타고 있는 나와 함께한 지인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동안 나는 보조기기와 목발을 번갈아 사용해 어지간한 단차나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었다. 또한 자동차를 운전함으로써 이동의 자유로움도 획득했다. 이런 단순한 일상적 행위는 장애를 가진 사람인 나를 비장애인과 유사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힘에 겨웠지만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이 든 지금은 목발 짚기가 버거워 긴 외출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된다. 휠체어에 앉아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용리단길처럼 낯설다. 1미터 남짓한 그 낮은 높이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장애’는 목발을 짚을 때보다 구체적이며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의 생생한 풍경이 무시로 펼쳐진다.

용리단길 맛집의 30센티 단차로 인해 나는 일상의 즐거움을 완벽하게 차단당했다. 가고 싶은 곳에 입장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없었으므로 나의 ‘장애’는 구체적인 차별 상황에 놓였다. 또한 내가 그 맛집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그 맛집에 있었던 사람 중 누구도, 하물며 맛집 주인조차도 그 비상식적인 상황에 의구심조차 품지 않는다. 되려 머무를 수 없는 곳이므로 ‘장애’는 그들에게 맛집을 즐길 수 없는 당연한 조건으로 여길 만큼 차별은 구조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불편하고, 드나들거나 머무를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고정관념이 되었고, 의외로 깨지지 않는 외피를 가진 일상적 신념이 된 듯하다. 현장에서의 ‘장애 운동’을 정치권의 젊은 주요 인사가 ‘성역화’라고 힐난하거나 ‘유사 장애인’들로 구성된 집단은 장애로 겪는 경험을 손톱 끝에 돋은 거스러미쯤으로 여긴다. 이러한 구조적인 관성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신 ‘장애’를 이야기하고 ‘판타지화’ 하는 등 습관적으로 주변화 시켜 대상화하는 반동적 현상으로 이어진다.

‘장애’가 ‘판타지’가 된 시대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교육 현장에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일터에서 조차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텔레비전에 등장한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 판타지’로만 회자될 뿐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는 방식에는 외면한다. 이제 ‘장애’는 불평등과 차별 통계 속의 수치로 환원되어 내놓는 게으른 분석의 근거일 뿐이다.

밤은 깊고 용리단길은 꽤 은성해졌다. 어둠은 시나브로 짙어지고 초여름에도 여전히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옅은 취기를 쫓던 나는, 올 듯 오지 않는 장애인콜택시를 기다리며 텅 빈 도로 끝으로 무심히 눈길을 보내며 혼잣말을 되뇌여 본다.

“집에는 갈 수 있으려나…”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승인
알림
6627874a8ec8a@example.com'

1 Comment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yulkook123@naver.com'
김열국
1 year ago

도와주지도 못하고, 대신 나서주지도 않는 비장애인들의 안일하고 무관심한 태도에 장애인들은 단 30센티조차 되지 않는 단차에 인생의 행복과 즐거움을 박탈당한다. 비장애인들에게 30센티정도의 단차는 오히려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요소다. 그들이 우리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다고 고작 몇 센티의 턱에 이렇게까지 차별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 배부르고 등따숩다고 그냥 넘어가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만 장애인들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