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객관적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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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상
▲정의의 여신상/ⓒPixabay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승준아! 너 절대로 객관적이지 말아라. 우리처럼 수학 공부한 사람들은 언제나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하려고 하는 게 제일 문제야.“

연애 고수를 자처하는 친한 친구가 내게 해 준 원 포인트 연애 레슨이다. 여자 친구와 다툼이 생겼을 때, 그녀가 화가 나 있을 때, 이유 없는 투정을 부릴 때마저도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즉시 편을 들어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 회사 상사가…”라는 말이 들리면 그 즉시 “그 자식 몹시 나쁜 놈이네!”라고 한바탕 욕을 퍼부어주고, “오빠! 나 너무 힘들어.”라고 하면 “고생이 많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너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밑도 끝도 없는 지지 선언을 하라는 것이다.

그녀가 남자친구에게 바라는 것은 상사와 본인의 과실 비율이 정확히 몇 대 몇인지를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규칙적인 운동과 영양 보충으로 체력관리를 하라는 등의 객관적 처치도 아니라는 것이 내 친구 연애 고수가 다수의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였다. 난 그저 그녀의 적을 최대한 비난하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의 편이라는 절대적 믿음만 보내주면 된다.

솔로몬처럼 지혜로운 재판도 드라마틱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처방전도 내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뿐더러 그런 것은 남자친구보다는 전문가에게 의뢰할 가능성이 더 높다. 최소한의 인격을 갖춘 지성인이라면 어쩌면 답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위로받고 싶었을 뿐이고 위로할 상대를 남자친구로 선택한 것이다. 원하는 대답이 객관적이지 않음을 너무도 명확히 알기에 그 대상을 사랑하는 이로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세상 사는 일은 녹록지 않다. 늘 힘들고 지치고 피곤한 것만 같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하더라도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어제도 그랬던 것 같고 그제도 그랬던 것 같고 난 늘 그렇게 사는 것만 같다.

우리에겐 무작정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돌아서서 생각하면 100% 내가 잘못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 조건 없이 얘기를 듣고 편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반성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일 뿐이다. 다른 이에게까지 늘 그렇게 가르침 받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라 그렇고, 그래서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객관적이라는 것도 사람들의 협의로 만들어진 인위적 약속일뿐, 처음부터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때때로 객관이라는 기준에 순응하는 것은 일방적인 희생과 억울함을 지속적으로 남기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이동권 시위가 한창이다. 많은 시민이 불편하다는 것, 방법이 다소 과격하다는 것, 예산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나도 그들도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으로부터 소수의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양보와 나중을 강요받았다. 그것은 수리적으로 볼 때 합리적이었고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아도 공공장소에 휠체어가 진입하지 못하여도 대다수를 위한 계단들이 있었으므로 그것은 예산으로도 효율적이었고 다수가 동의하였으므로 객관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동권과 관련한 법률이 제정되고 편의시설들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전부가 아니어도, 완벽하지 않아도 그것은 합리적인 타협의 선이라고 불렸기에 더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반지성이라고 여겨졌다. 객관이며 논리며 하는 것들은 소수에게 납득할 수 있는 선으로 약속되고 정의되지 않는다.

배제된 소수에겐 무조건 들어주고 편들어줄 남자친구가 필요하다. 지금은 그렇다. 따져보고 계산하고 판정받는 객관이라는 기준에 맞추기에 소수의 억울함은 20년을 쌓아왔다. 조금 과격해도 조금 불편해도 아니 많이 이상해도 무조건 편들어주고 위로해 줄 다수를 필요로 한다. 그들도 인격을 갖춘 지성인이다. 다만 객관이라는 규범 안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오랜 시간 겪어왔기에 억울함이 불편한 모양으로 표출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을 반지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수의 결정을 객관이라 포장하는 이기적 합리화일 뿐이다.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의 일방적 위로를 원한다. 소수는 다수가 조건 없이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지하철을 멈춰 세운 것은 다수를 불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수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많이 가진 다수가 작은 것을 바라는 소수에게 관대한 이해와 지지를 보내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싶다.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다수와 소수가 서로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우리 때로는 객관적이지 말자!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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