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오죽하면… 이라는 연민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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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를 죽여줘(Kill me now). 사진=유튜브(예고편)
▲영화 나를 죽여줘(Kill me now). 사진=유튜브(예고편)

  • 영화 나를 죽여줘(Kill me now)>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뇌병변장애를 가진 고3 아들을 목욕시키다 발기되는 아들을 보며 ‘할 수 없는 것들이 또 하나 늘어난’ 아들의 장애를 실감하고 고뇌하게 되는 아버지. 영화 <나를 죽여줘>의 첫 장면은 그렇게 시작된다. 직설적인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보기엔 다소 거북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직면한 현실이기도 하니까. 영화 <컴 애즈 유 아(Come as you are), 2019>와 비슷한 영화인가 보다 했다.

영화 <컴 애즈 유 아>는 2011년 벨기에 영화 <아스타 라 비스타>를 리메이크한 영화로 장애가 있는 세 남자가 소위 첫 경험을 하기 위해 국경 너머 캐나다까지 생애 첫 장거리 여행을 떠나며 겪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놀라움이다. 장애인도 성적 욕구를 지닌 인간이라는 평범한 사실이 새삼 새롭지도 않을 이 21세기에 영화의 신선도 지수인 로튼 토마토 지수가 무려 100%라니! 게다가 장애인도 성을 가진 인간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또 어찌나 새삼스럽게 많은지 그 사실이 내겐 더 놀라웠던 영화이기도 하다.

<컴 애즈 유 아>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성적 해방을 위해 ‘있는 그대로’ 다 받아준다는 성의 파라다이스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그렇다면 <나를 죽여줘>의 현재는 자신의 성적 욕구와 직면한 뒤 어떤 선택을 할까.

욕망에 직면한(성적 욕망이든, 죽음에 대한 욕망이든) 두 남자. 아버지(민석)는 아들(현재)을,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 주는 것’으로 서로의 서글픈 욕망을 해결한다. 전자는 성적인 절정을 의미하는 죽음을, 후자는 말 그대로 생을 끝내는 죽음을. 나를 죽여줘‘라는 제목은 그래서 중의적이다.

첫 번째 현재의 죽음, 그러니까 소위 ‘죽이는’(성적 욕망의 해결로서) 선택은 영화<컴 애즈 유 아>의 그들과는 다르다. <컴 애즈 유 아>의 그들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도모하는 반면, 현재(안승균)의 선택은 아버지(장현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극적이며 절망에 가깝다. 그야말로 절망과 포기에서 기인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을 괴물로 여기는 절망, 아버지라도 나서주지 않으면 평생 성욕을 해결하지 못하는 불쌍하고 가엾은 존재로 여기는 절망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아파한다. 그래서 내린 선택은 아버지가 구원자로 나서주는 것.

그 선택에 관한 판단은 일단 유보하고, 오죽하면, 그렇게라도… 남성의 성에 대해 더 관대한 이 사회에서 만약 이 영화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꿔 본다면 어떻게 될까?
남성의 성욕은 풀어야 하는 것, 여성의 성욕은 참아야 하는 것이란 인식이 더 지배적인 사회에서 성욕을 가진 존재로서 장애인의 성을 말할 때조차도 대부분 남성의 성이 위주가 되는 기울어진 성 인식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장애인도 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하고 새삼스러운 사회에서 장애인이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가진 성적 욕구에 대한 논의를 얼마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먼저 들어서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하고.

이 세상에 죽어도 되는 사람이 있을까? 두 번째 죽음, 아들이 건네는 약으로 생을 마감하는 민석의 죽음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희귀병이 악화한 민석은 극도의 고통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아들 현재에게 죽음을 부탁한다. 조력자살, 존엄사라 일컬어지는 바로 그런 죽음 말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죽어도 된다고, 인제 그만 살아도 괜찮다고 죽음을 용인해 줄 수 있을까. 오죽하면, 그렇게라도… 죽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일상이 온통 고통에 잠식당하고, 밥이 아닌 약으로 생이 유지되며 존재로서 무력해지고 소중한 이들 앞에서 냄새나는 변을 쏟아놓는 참담한 치욕을 견뎌내야 하는 민석의 경우처럼 그런 잔인한 상황에서라면 정말 죽어도 괜찮은 걸까?

고통스러운 삶보다 존엄하다는 그런 죽음 앞에서 나는 종종 모욕감을 느낀다.
“넌 그게 먹어져?” 살기 위해 불어 터진 라면이라도 욱여넣고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젓가락을 집어 던져버리는 상황 같달까.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않고 신세 질 필요 없는 건강한 몸, 온전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무해하고 무결한 삶만이 존엄한가. 민석이 치욕으로 느끼는 그런 상황을 많은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는다. 누군가의 도움과 돌봄이 필요하고 때때로 스스로 신변처리할 수 없는 민망함을 견뎌내야 하고 연약한 몸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사회로부터 번번이 민폐 취급당하는 그런 삶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의 삶이 존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상에 죽는 게 더 나은, 죽어도 괜찮은 존재는 없다.
자칫 존엄을 얘기하며 구차한 생은 마치 오물 지우듯 말끔히 닦아 없애 버리는 그런 결론이 나는 좀 불편하다. 돌봄 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들에게 ‘알아서 죽어야 하는’ 책임을 은밀히 강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도 든다.

진정한 존엄은 끝내 ‘살아내는’ 용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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