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동화 말고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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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책 ⓒ픽사베이
▲ 이야기 책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어릴 적엔 그림 동화책 읽는 것이 좋았다. 주인공은 언제나 내가 바라는 대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백설 공주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쓰러진다든가 흥부네 식구가 놀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난다든가 하는 작은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몇 장 넘기지 않은 짧은 미래에 권선징악이나 해피 엔딩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쯤은 전집 동화 한 질 정도 읽고 난 뒤부터는 책의 겉표지를 볼 때부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들은 내 어린 시절의 마음을 몽글몽글 쓰다듬어 준 고마운 친구였지만 어찌 되었든 행복할 거라는 뻔한 결말은 책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흥미를 잃게 만드는 반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핑계라 하시겠지만 끝까지 읽지 않아도 결말이 예상되는 책들 덕분에 난 한동안 책과 담쌓은 아이로 지냈다.

내가 다시 책이란 녀석과 조우하게 된 것은 실명 이후 녹음 도서를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특수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라 특별히 할 일이 많지 않았던 내게 소설과의 만남은 답답한 동굴에서의 탈출 같은 것이었다. 자도 자도 가지 않는 지루한 시간을 살던 내게 녹음된 도서들은 세상은 여전히 빠른 시간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시켜주었다.

소설은 동화책보다 몇 배는 두꺼웠고 등장인물의 숫자도 많았다. 어떤 것은 시리즈로 몇 권씩 스토리가 이어지기도 했고 시즌을 바꿔가며 연재가 끝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 새도록 책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 때문이었다.

동화라면 적당한 위기를 극복한 주인공이 “짜잔”하고 백마를 타고 다시 나타날 타이밍인데 그의 실패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결국 몰락하거나 죽기까지 했다. 또 다른 주인공이 생겨나기도 하고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다른 공간과 시간이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는 무한 확장의 스토리들은 직접 읽고 확인하지 않고서는 결말을 예단할 수 없었다.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분노와 울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그랬기에 재미있었고 그 때문에 끝까지 꼼꼼하게 책을 넘겼다.

재미난 것은 소설의 재미를 알아가던 그때쯤 내 삶도 예측불허의 상황들로 페이지를 채워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화 같은 결말만을 꿈꾸던 유복한 어린이에게 상상도 못 한 실명 선고가 내려지고 또 다른 장면들이 펼쳐지고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는 스펙타클한 시간이 주어졌다.

며칠 혹은 몇 달 지나면 “번쩍!”하고 돌아올 것만 같던 시력은 수백 장의 달력을 넘겨도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상황들 속에서 불가능해 보이던 성취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 삶이 소설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소설은 누군가의 삶을 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삶은 점점 동화를 벗어나 소설을 닮아갔다.

다시 해가 떠야 다음날을 알 수 있었고 또 새해가 밝아야 한 살 더 먹은 내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복잡하고 어렵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멈추지 않고 살았다. 동화처럼 살았다면 더 좋았을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의 삶이란 게 동화가 될 수는 없고 그런 식의 페이지들은 얼마 가지 않아 지루하고 재미없어졌을 것을 오래전 독서 경험으로 나는 알고 있다.

담담한 음식에는 자극적인 반찬이 필요하고 한없이 평평한 길보다는 구불구불 굴곡진 길이 더 오래갈 수 있는 것처럼 평탄하기만 한 삶보다는 우당탕탕 곡절 많은 삶이 재미난다. 아름다운 궁전에서 태어나 화려한 삶을 살다가 이웃 나라 공주님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세계적인 수학 천재가 되려 했으나 불의의 의료사고로 실명했고 그 이후 불굴의 노력으로 엄청나게 성공하려 했으나 또 그러지는 못하고 평범한 수학 교사로 살고 있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마구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몇 배는 멋지지 않은가?

난 동화 아닌 소설의 주인공이기에 내일의 페이지를 언제나 기대한다. 지루하지 않게 살고 싶다면 지금 느끼는 힘든 일들은 극 전개를 위해 필수장면이다. 어쩌면 조금 더 위기가 찾아오는 것도 극적 결말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겠다.

우리는 이제 동화 속 어린아이가 아니다. 소설이 재미있다면 4D형 체험소설인 내 삶도 즐겨보자!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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