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은폐된 빈곤’, ‘포르노’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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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여사가 지난 11월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안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홈페이지 사진 편집
▲김건희 여사가 지난 11월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안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홈페이지 사진 편집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재활원 시절,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맘때쯤이면 자주 현관 앞으로 불려 나가 기증품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어야 했다. 기증품들과 인자한 표정의 어른들 품에 안겨 사진에 찍히는 일은 어린 생각에도 여간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몸서리나게 추웠고, 나프탈렌 냄새에 찌든 원생복을 입기 싫었다. 노란 털실로 짠 원생복은 낡아 소매 끝 실마리가 풀어졌고 팔꿈치에 덧댄 검은 비닐조각은 깨진 유리처럼 잘게 갈라져 있었다. 안장 대신 나무판자를 깐 고물 휠체어에 두 명씩 끼여 앉은 까까머리 아이들이 휘뚱휘뚱 현관 앞에 모이면 재활원 직원들은 잽싸게 기증품 하나씩을 나눠주었다. 기증품은 매번 바뀌었다. 주전부리 과자부터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거나 쌀, 라면, 의복 등 다양했다. 그 귀한(?) 기증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어른들은 행사 내내 우리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메라 앞에서 연신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체 사진으로 행사가 마무리되면 사람들의 선한 마음들이 재활원 창고에 눈처럼 쌓였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중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심장병을 앓는 한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이 논란이다. 전형적인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라는 비판부터 연출의 극대화를 위해 조명을 썼다는 주장까지 온갖 구설이 난무했는데, 가장 황당한 것은 ‘빈곤 포르노’에서 ‘포르노’라는 단어만을 뚝 떼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라는 주장이다.

‘빈곤 포르노’는 이미 오래전 확립된 개념이다. 1980년대 초 영국의 한 자선단체가 에티오피아 대기근 구호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앙상하게 마른 흑인 어린이들이 더러운 빈 그릇을 긁는 사진 한 장을 기금 마련 홍보 이미지로 사용했는데 당시 무려 2300만 달러를 모았다고 한다. 이후 다른 구호단체들도 이와 비슷한 이미지를 기금홍보에 이용했다. 그러자 덴마크의 한 원조단체 대표인 외르겐 리스너는 “굶어서 배가 부풀어 오른 아이들을 광고에 공개하는 것은 사회적 포르노그래피(social pornography)”라면서, 당사자의 몸, 비참함, 슬픔 등을 무분별하게 전시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나섰다. 유럽 비정부기구(NGO)도 ‘애처로운 이미지’나 ‘편견을 부추기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강령을 채택했고, 이 강령은 2007년 ‘국제개발NGO’에 의해 “미래의 모든 의사소통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 진실성의 핵심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8년 더타임스 칼럼니스트 앨리스 마일즈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백인 중심 선진국 관객들의 알량한 동정심과 선의의 즐거움을 위해 인도의 가난을 오락거리로 활용했다고 비판하면서 처음 ‘빈곤 포르노’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후 ‘빈곤 포르노’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적절하게 타인의 가난과 비참함을 재현하는 방식을 일컫는 개념으로 정착됐다.

지난 25일 서울 신촌에서 또다시 생활고 시달리던 모녀의 방치된 주검이 발견되었다. 이 모녀가 남긴 건 바닥을 드러낸 쌀 봉지와 1년 넘게 밀린 건강보험료 독촉 고지서였다니 참담할 노릇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주검이 발견되기 불과 하루 전에 국가는 ‘복지사각지대 발굴지원체계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모녀 또한 전날 발표된 대책의 ‘위기가구’였지만, 국가는 이들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니 김건희 여사는 사진 한 장으로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의 목숨을 살렸지만, 국가의 빈곤 대책은 ‘위기가구’로 ‘발굴’했던 한 모녀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채 ‘정책 포르노’로만 남은 셈이다.

어린 시절, 자선가들의 ‘빈곤 포르노’ 행사에 모델로 일조했던 나는 캄보디아 가난한 심장병 어린이에게 향했던 김건희 여사의 선의를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되려 조악한 사진 한 장으로 한 어린 생명을 살렸으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랄까. 그래서 나는 두렵다. 굳이 ‘빈곤 포르노’에 군소리를 덧대는 이유도 김건희 여사의 사진 한 장이 드러낸 우리 사회의 빈곤에 대한 관점과 태도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빈곤이 한 장의 사진으로 대상화되거나 자선단체의 모금 홍보로 이용되는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공감하기까지 한다. 국가조차 빈곤을 결핍된 특정 계층의 문제로 구별 짓고, 미디어는 추상화된 미담 따위로 남의 일인 듯 대상화해 은폐하려 한다. 담론은 사라지고 자성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문청 시절이던 90년대 초반 나는 ‘고장난 음모’라는 습작소설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200자 원고지에 펜으로 쓰던 때라 지금은 초고조차 남지 않은 졸작이지만, 소재가 ‘동사(凍死)’였다는 것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제법 먹고살 만해졌다는 당시에도 겨울만 되면 가난한 이들의 동사가 뉴스거리였고, 사회적 빈곤의 잣대처럼 여겨졌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가난한 이들은 ‘동사’에서 ‘고립’으로 이유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죽어가고 있다. 이제 가난한 몸과 누추한 이부자리, 독촉고지서 더미, 텅 빈 밥솥, 슬픈 표정들은 감추고 싶은 현상이 아니라 가상 공간에 박제된 채 무시로 드러나는 영원한 우리의 자화상이 되었다.

[더인디고 yslee506@naver.com]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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