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나사엔 각각의 구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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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나사 ©unsplash
▲여러 가지 나사 ©unsplash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오랜만에 집으로 놀러 온 동생들이 불현듯 에어컨을 청소해 주겠다고 한다. 탈부착할 수 있는 필터 정도야 이따금 내가 씻고 닦고 한 터라 깨끗한 편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기 내부의 곰팡이라며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드라이버와 각종 공구를 챙겨온다.

청결한 것이 좋은 것도 알겠고 곰팡이를 방치했을 때 내게 주어질 나쁜 영향들에 대해서도 알겠는데 이 녀석들은 에어컨 수리기사도 청소 전문업체 소속도 아니다. 관련한 업체에 맡긴다면 아무리 적게 들어도 10만 원 정도가 든다며 내 결정을 재촉했지만 분해한 에어컨이 다시는 정상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내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었다.

지난주에 본인 집의 비슷한 모델을 완벽하게 청소했다는 녀석과 따지고 보면 본인의 전공과 현업이 에어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녀석들은 나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이미 기기의 케이스를 걷어내기 위한 드라이버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많이 불안했지만 일은 벌어진 터였고 선의를 베풀겠다고 달려드는 동생들에게 업체에 맡기겠다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도 대범한 형의 모습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이렇게 여는 게 아닌가봐!”

“어라! 이런 나사는 처음 보네!”

“이건 우리 집 것이랑은 좀 다르네.” 하는 말이 들릴 때마다 심장이 움찔움찔했지만 “거봐! 이렇게 곰팡이가 많네!”라고 할 때는 ‘역시 하기를 잘했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겹 두 겹 걷어내고 뜯어내는 동안 하나 두 개씩 나오는 나사들은 섞이지 않도록 이곳저곳에 분리해 두었는데 길이도 모양도 정말 다양해서 나중엔 더 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바닥을 채웠다. 십자, 일자 정도만 있을 줄 알았는데 y 자도 있고 삼각형 비슷한 것도 있었다. 머리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이 있는가 하면 각각 길이도 달라서 비슷한 듯 다른 모양의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적당히 기억하려던 처음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 사람의 머리를 합친 용량의 한계를 마주했다. 작은 통들에 나누어 담고 사진도 찍어두고 최대한 도구를 사용하여 문명으로 인간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생각보다 분리와 청소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작업에 가담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목적한 바는 100% 이상으로 완수되었다. 재조립도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처음에는 순조로워 보였다.“착! 착!”하는 경쾌한 조립음과 “윙! 윙!”하는 전동드라이버 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마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다만 그 상쾌함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사가 들어가야 할 구멍은 있는데 맞는 나사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 끝까지 밀어 넣은 나사는 구멍보다 긴 것이어서 위로 삐죽 나오기도 했다. 다시 분리하고 또 해체하고 잘못된 곳에 박혀있는 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바꾸고 하는 작업을 셀 수 없이 반복했다. 처음부터 사진으로 자세히 남겨두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설픈 기억력을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기록하고 분리하고 했던 덕으로 약간의 시행착오는 줄일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예상했던 시간을 몇 배는 훌쩍 넘긴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동생들은 “성공!”이라는 탄성을 질렀다. 인공위성 발사에라도 성공한 듯 기뻐하는 두 녀석의 발 앞에는 결국 위치를 찾지 못한 서너 개의 나사가 뒹굴고 있었다. “기계를 조립하고 분해하다 보면 나사 몇 개쯤 남는 것은 예의지.”라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에어컨에 안심하는 동생들을 보며 배제 받은 나사들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에어컨 속에는 수많은 형태와 크기를 가진 나사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수많은 구멍 중 각자에게 맞춰진 고유의 위치를 갖는다. 어떤 것은 짧고 작고 또 다른 어떤 것은 길고 크지만, 그 역할의 크기는 나사의 크기와는 관계없다. 다만 각각의 역할이 존재하고 그 역할과 위치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사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구멍이 만들어진 것인지 필요한 구멍들이 생겨나고 그 모양에 맞게 나사가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나사가 자신의 위치에서 깊숙이 박혀있을 때 비로소 에어컨은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기능을 수행한다. 때로는 몇 개의 나사가 배제된 상태에서도 에어컨이 동작할 수 있지만 기계 밖을 굴러다니는 나사도 어딘가에 비어있을 구멍들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나사들의 위치를 찾아주기 위해서 우리는 복잡하게 조립된 에어컨을 다시 바닥까지 분해해야 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모든 나사의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이 처음 에어컨을 설계한 이의 목적과 부합한다.

몇 개의 나사 없이도 기기가 동작하는 것을 정상상태라 여기고 방치하는 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대한 다수 나사의 배제 합리화이다. 기기를 처음 만든 이가 필요 없는 나사 몇 개 정도를 더 박아놓았을 리 없다.

한두 개의 작은 나사의 차이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기기 전체의 불안함이 될 수 있다. 혹은 또 한 번의 분해와 조립 속에서 추가되는 배제들이 용납됨을 반복하면서 다수 나사의 배제 합리화는 그 대상의 크기를 늘리고 어느 틈에 동작하지 않는 기기의 폐기로 이어질 것이다.

모든 나사는 각각에 맞는 구멍과 역할이 처음 공장에서부터 주어졌다. 기기 전체를 위해 어느 나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부품이 정확히 자신의 자리를 찾는 조립만이 에어컨의 유일한 완성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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