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밥벌이와 상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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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비에 젖듯 일상에서 체화되는 약자에 대한 무의식적 폭력과 혐오, 그 떠름한 경험과 기억에서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극도의 체제 순응이 폭력성으로 이어진다는 상황 인식을 통해 스스로 지켜내는 수밖에 없다. Ⓒ 더인디고 편집
▲부슬비에 젖듯 일상에서 체화되는 약자에 대한 무의식적 폭력과 혐오, 그 떠름한 경험과 기억에서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극도의 체제 순응이 폭력성으로 이어진다는 상황 인식을 통해 스스로 지켜내는 수밖에 없다. Ⓒ 더인디고 편집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1961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책임으로 이스라엘 전범 법정에 선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후 ‘악의 평범성’ 테제를 제시했다. 홀로코스트 인종학살에 가담했던 아이히만은 생각할 능력이 결여된 그저 ‘평범하게 밥벌이에 충실한 관료’였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통해 발견한 것은 나치즘이라는 인종주의에 경도되어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악마적 인간’이 아니라 그저 ‘밥벌이와 인습을 따르는 거대한 기계 속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아이히만은 정말 밥벌이에 충실했던 톱니바퀴에 불과했을까?

지난 2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삼각지역 지하철 행동을 저지하기 위한 서울교통공사의 직원들과 서울시의 요청으로 출동했던 경찰들의 행태는 지나치게 위험하고 폭압적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1분이 늦어도 큰일’이라는 단 한 마디에 삼각지역의 그 비좁은 승강장에 방패를 든 수백의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전장연 활동가들과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하철에 탑승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탑승을 저지하려는 힘겨루기는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고, 비명과 고함이 인파가 토해내는 가쁜 숨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휠체어 한 대에 수십 명의 경찰들이 달라붙고,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상스러운 혐오발언 도발을 못 참았던 묵직한 전동휠체어 한 대가 경찰 대열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의 이유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거친 발언들이 여과없이 뒤섞이고 온갖 비아냥과 속된 욕설들이 난무했다. 서울교통공사 직원들과 지하철 보안관들은 오세훈 시장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무하기 위해 가쁜 숨을 들이쉬며 휠체어를 밀어내고 퇴거명령을 반복해 외쳤다. 경찰들도 이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 ‘통제와 진압’이라는 조직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열을 이뤄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을 기어코 막아냈다.

상부의 지시에 의한 업무 수행 과정에서 한두 마디쯤 “야, 이 병신새끼야!”하는 욕설도 내뱉고, 휠체어를 파손도 했지만,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공권력’ 수행이라는 대의와 자신의 밥벌이 과정에서 빚어진 사소한 ‘실수’는 묻혔다.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상부의 지시에 충실한 ‘선량한 시민이자 공무원’이며, ‘불법’에 맞선 ‘순진한 명령집행자’였을 뿐인 셈이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는 게 곧 드러났다. 아이히만의 상관이던 하인리히 뮐러가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아이히만은 지배 체제와 끊임없이 소통했던 능동적 명령수행자였으며 정치적 사회화를 통해 그 폭력성을 증대시켜 왔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상부 지시를 따른 ‘순진한 명령집행자’였던 서울교통공사 직원들과 경찰들이 아이히만처럼 폭력과 혐오를 자발적으로 수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밥벌이를 위해서건 상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었든 현장에서의 폭력과 욕설은 스스로 행한 자발적 행위였다는 점이다. 상부의 명령은 ‘통제’였지, ‘폭력’도 ‘상스러운 혐오 발현’도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서민들에게 밥벌이 행위는 그 어떤 명분보다 비정상성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해와 용서의 이유가 되곤 한다. 하지만 행위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유 부재로 인한 폭력이었다면 그 비정상성의 명분은 없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연극에 속았다고 해서 ‘악의 평범성’이 결코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평범함이 극도의 체제 순응을 위한 폭력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분명해졌을 뿐이다.

밥벌이가 상스럽지 않으려면 가랑비에 젖듯 일상에서 체화되는 약자에 대한 무의식적 폭력과 혐오, 그 떠름한 경험과 기억에서 스스로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약자의 분노에 찬 목소리와 행위가 듣기 싫고 꼴도 보기 싫다면, 세상에서 배제된 그들 탓이 아니라 그들을 배제한 세상과만 공감하려는 자신의 상스러운 무지 때문임을 인식할 일이다.

[더인디고 yslee506@naver.com]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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