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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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풀타임의 한 장면. 주인공 쥘리가 철도파업으로 인해 파리발 모든 열차 운행이 취소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쳐다보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영화 풀타임의 한 장면. 주인공 쥘리가 철도파업으로 인해 파리발 모든 열차 운행이 취소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쳐다보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 영화 <풀타임>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쥘리는 호텔 룸메이드로 일하며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육아만으로도 매일이 힘겨운데 양육비를 주지 않는 전남편 때문에 생계도 늘 아슬아슬하다. 게다가 대규모 철도파업으로 날마다 출퇴근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영화 <풀타임, 2022> 이야기다.

교통이라도 원활해야 그녀의 멀고 먼 장거리 출퇴근이 그나마 좀 수월하련만 대규모 교통파업으로 그녀가 겪어야 하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꼭두새벽마다 곤히 자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이웃 할머니 집에 맡기고 몇 대 운행되지 않는 기차를 타기 위해 캄캄한 새벽부터 숨넘어가도록 달려야만 한다. 퇴근 역시 필사적이긴 마찬가지. 때론 차가 끊겨 집에 돌아갈 수 없는 눈앞이 캄캄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엄마 없이 보내야만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생지옥이 따로 없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지각하지 않으려고, 맡겨 놓은 아이들을 제시간에 찾으려고, 구직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영화 내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덩달아 숨이 가쁘다.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쥘리 같은 가난한 한 개인, 또 다른 노동자의 심각한 희생을 야기하는 서글픈 상황을 영화는 섬세하게 그리지만 쥘리는 그런 상황을 결코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쥘리를 그렇게 힘든 상황으로 내모는 것은 철도노조의 파업이 아니라 철도노조가 파업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불합리한 노동환경과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쥘리는 애꿎은 대상을 향해 불필요한 증오를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1955년 파리에서 파업기간 동안 파리의 시내와 시외에 살았던 사람들이 위대한 연대를 보여주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걷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서로를 돕는 등 도시 환경에서 다르게 기능하는 방식들을 찾아냈다. 나는 일상의 투쟁과 위대한 연대가 뒤섞인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연히도 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노란 조끼 시위가 시작되었다.”

영화 <풀타임>을 감독한 에리크 크라벨 감독은 이렇게 인터뷰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개인과 집단의 투쟁이 나란히 진행되기를 바랐고 그 과정에서 점차 서로가 연결돼있다는 것을 관객들이 깨닫길” 바란다고 했다.

새해에도 어김없이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역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로 인한 열차 지연을 공지하는 긴급재난경보가 시위 현장에서 한참 먼 지역에 사는 나에게까지 울리고 시위를 비난하는 무수한 악플이 달리는 상황을 지켜보며 영화 <풀타임>과 감독 에리크 크라벨의 인터뷰가 더 선명한 의미로 다가왔다.

시위로 지연되는 지하철 안에는 분명 저마다의 절박함을 지닌 수많은 쥘리들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각할까 봐, 누군가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까 봐, 혹은 정말로 어느 시민의 항변처럼 누군가는 사랑하는 가족의 임종을 놓칠까 봐 속이 타들어 가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테다. 그 5분의 지연이 5시간만큼이나 얼마나 길고 초조할지 그 애타는 심정 충분히 짐작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 5분이 빼앗기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보태는 시간이라면 어떨까? 철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쥘리가 묵묵히 일상의 불편을 견딘 것처럼 5분의 지연시간을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묵묵히 견디고 연대하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전환해 본다면 결국 그 시간은 나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 살고 싶은 세상을 선택하는 나의 결단이 된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지역사회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함께 살 수 없고 어디든 맘껏 다닐 수 없는 사회라면 적어도 모두가 행복한 좋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막다르게 내몰린 약자들의 절박한 비명이 ‘재난’으로 취급되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수의 편의와 효율성이란 명분으로 손쉽게 약자를 지워버리는 세상에서 과연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남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로가 서로의 권리를 뺏고 빼앗기는 제로섬의 방식으로 우린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의 권리 보장을 위해 남성의 권리를 빼앗거나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비장애인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좋은 세상을 만드는 원칙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더 편파적으로 편들어 주는 것에 있다. 약한 사람들이 서로의 약함을 붙들고 단단하게 연대함으로써 누구도 낙오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세상이 모두를 위해 좋은 세상, 결국 나를 위해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손도 놓지 않아야 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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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awu73@gmail.com'
lee heejeong
1 year ago

공감가는 글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것을 빼았는게 아닌데 말입니다. 결국에는 모두의 것 인데 말입니다. ^^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