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점, 선,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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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면 ©이민호
▲점선면 ©이민호
  • 권리의 기본 요소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출근하고, 투표하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병원에 가는 일상을 누리기 위해 한 지점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한다. 그것은 장애인인 나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동권’이라고 정의한다. 이동권이라는 단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장애인들이 투쟁을 통해 역사로 불러내었다. 그 투쟁은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에 의해 점화된다.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는 2001년 1월 22일 발생했다. 설날을 맞아 노부부는 상계동에 있는 큰아들 집에 가기 위해 오이도역에 도착했다. 당시 3급 장애인이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2층 역사로 올라가기 위해 장애인용 리프트에 탑승했다. 2층에 리프트가 도착했지만, 지탱하는 철선이 끊어져 노부부는 리프트에 탄 채 7m 아래로 추락한다.

사고 이후 역무원들이 119에 신고해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할머니는 치료 중 사망한다. 하지만 당시 정부 관계부처와 철도청 관계자들은 할머니가 사망 후 9시간 동안 사고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사고 현장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아 원인 규명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 이전에도 유사한 사고들이 발생했지만, 관계 당국은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이에 사건의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촉구하기 위해 ‘오이도역 장애인 수직형 리프트 추락 참사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는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고 목소리 내며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폭로했다. 서울시에 지하철 승강기 설치와 저상버스 도입을 요구하며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다. 수년에 걸친 투쟁을 통해 서울시의 요구 이행 약속을 끌어냈다.

하지만 장애인 이동권의 문제는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모든 장애인과 교통약자의 보편적 권리에 관한 것이기에 질긴 투쟁을 전개하였고 2005년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로서 이동권을 명시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 제정을 끌어낸다.

지난달 2023년 1월 22일은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2주기가 되는 날이다. 하지만 참사 이후에도 수도권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 추락 참사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여전히 장애인은 교통수단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서울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 중 휠체어 이용자와 교통약자의 탑승이 쉬운 저상버스 비율은 절반 수준이다. 지역 상황은 더 좋지 않은데 저상버스가 단 한 대도 없는 노선이 존재하고 절반 이하의 도입률에 해당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시외 지역으로의 이동은 더 열악하다. 휠체어 탑승 가능한 시외·고속버스는 2019년에야 시범적으로 운행했는데 2석의 휠체어 좌석을 설치한 차량은 10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경제성을 이유로 3개 노선이 운행을 중단해 7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휠체어 탑승 장비가 설치된 장애인 콜택시를 운영하고 있지만, 법률에 따라 확보해야 하는 도입 대수를 충족하지 못하는 지역이 많다. 그로 인해 대기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날 예약해야 하는 곳도 있다. 지역 내 이동이 불가한데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가능할 리 없다.

“그러면 편리한 지하철을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녹록지 않다.

2015년 서울시는 모든 지하철 역사에 2022년까지 승강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지만 미설치된 역사가 21곳에 이른다. 그 와중에 2018년 신길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다 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재발한다. 오이도역 사건이 재현된 것이다. 하지만 지난 2월 서울시는 모든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 계획을 2025년으로 미루어 버렸다.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장애인들은 지난 세월 동안 투쟁했다. 오랜 투쟁 끝에 2022년 12월 31일 이동편의증진법이 개정되었지만, 저상버스 의무 도입 대상에 시외·고속버스를 제외했다. 장애인 콜택시 등 특별교통수단을 확대하고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연계할 이동지원센터 운영 지원에 관한 예산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즉,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배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된 것이다. 시민의 기본 권리를 예산이라는 잣대로 삭제해버린 것이다.

22년 전 장애인들의 투쟁은 이동권을 보장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배려의 영역이 아닌 ‘권리를 위한 권리’이자,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선포하며 시작되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리프트에 몸을 맡기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이동권은 그 자체로도 권리이지만, 다른 권리를 누리기 위한 매개적 권리이기도 하다. 출근하고, 투표하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고, 병원에 가는 일상을 누리는 데 필요한 ‘권리를 위한 권리’이다.

가만히 멈추어 있을 때 장애인은 작디작은 ‘점’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 ‘점’이 ‘면’이라는 공간에 나아가 시민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이동권이라는 ‘선’을 통과해야만 한다. 어릴 적 “점은 출발점이며, 점이 움직인 자리가 선이고, 선이 움직인 자리가 면이 된다.”라는 도형의 기본 요소를 배웠는데 이동권은 권리 보장을 위한 기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장애를 가지지 않은 모든 시민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수많은 점이 이동하기에 지금의 선은 너무 얇고 위태로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정부가 이 선을 정비하고 강화하지 않는다면 장애인들은 한 지점에 정지해 있어야 한다. 정지 상태가 지속되면 점들의 연대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팀장으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애 인권 이슈를 ‘더인디고’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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