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그들의 절멸, 필리사이드(filicide)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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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각 도시에서는 부모나 가족, 조력인에 의해 살해된 장애를 가진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매년 3월 1일 추모 집회가 열린다. Ⓒ https://www.eventbrite.com 갈무리
▲미국의 각 도시에서는 부모나 가족, 조력인에 의해 살해된 장애를 가진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매년 3월 1일 추모 집회가 열린다. Ⓒ https://www.eventbrite.com 갈무리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봄은 여전히 먼빛으로 남아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아른대는 신기루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장애를 가진 자녀와 함께 ‘동반자살’ 했다는 사람들의 흉흉한 소식은 여전히 늦겨울 바람처럼 서늘하다. 장애 당사자들이 나서 ‘동반자살’이 아닌 ‘살해 후 자살’이라고 비판했지만, 언론은 한결같이 ‘동반자살’이라는 비극적 신파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 죽음의 애도 또한 죽임을 당한 당사자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초점이 맞춰지고 살해의 변명과 정당화는 더욱 공고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죽임은 우리 사회 모두가 공범으로 가담하는 절멸(絶滅)을 위한 계획인지도 모르겠다.

매년 3월 1일이면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한 장애 관련 커뮤니티(disability-memorial.org)의 주도로 가족이나 조력인에 의해 살해되거나 강제로 자살에 이른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집회가 열린다. ‘장애인 애도의 날(The Disability Day of Mourning)’이라고 부르는 이 집회는 필리사이드(filicide), 그러니까 부모나 친척 등 가족 구성원이 장애가 있는 자녀나 부모, 형제 등 친척을 살해하는 행위를 규탄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모임이다. 이 커뮤니티의 메모리얼 리스트에는 현재까지 1,800여 명의 희생자의 사진과 명단, 살해 방식과 판결 결과까지 상세히 수록해 장애를 가진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필리사이드는 법적으로 살인, 과실치사 또는 단순 살인으로 분류되며 대부분의 사건은 논의, 정당화, 변명, 복제 등의 방식으로 반복 패턴을 갖고 여론에 의한 명분을 갖게 된다. 이러다보니 사건은 살인 행위에 대한 법적인 정의 실현 대신에 사회적 동정과 ‘오죽했으면 가족을…’ 하는 심정적 동조가 재판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미국의 자폐증 자기 옹호 네트워크(ASAN)는 지난 5년 동안 유아부터 노인 등에 이르기까지 650명 이상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가족이나 조력인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루더만가족재단(Ruderman Family Foundation)은 매주 한 명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부모나 조력인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이토록 빈번하게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살인 행위는 반복되고 있지만, 희생자들을 위한 법적 정의(正義)는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되레 ‘절멸’되어야 하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장애 당사자들은 주장한다. 특히, 언론은 필리사이드 사건이 일어나면 가해자에 대한 동정적 여론을 환기한다. 장애를 가진 가족을 돌보는 일의 과중함과 사회적 지원의 미비 등을 대서특필함으로써 살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2009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매튜 셰퍼드 및 제임스 비어드 주니어 증오범죄방지법에 서명함으로써 1969년 제정된 증오범죄법의 범위 사유 목록에 ‘장애’를 추가했다. 하지만 2014년 장애가 있는 세 자녀를 살해한 후 자살을 시도했던 이른바 ‘타니아 클라렌스 사건’은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을 부질없는 짓으로 만들었다. 타니아 클라렌스는 “장애를 가진 세 아이의 미래는 희망이 없는 만큼 삶의 질이 수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건 담당 검사는 “클라렌스 부인이 세 자녀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서 살해한 것이 분명하다”면서도, “범행 당시 세 자녀의 ‘돌봄 고통’에서 벗어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고 살인 행위에 대한 정당성까지 기소장에 적시해 옹호했다. 이렇듯 희생자들의 삶은 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소중해야 하지만 한낱 ‘고통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절멸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죽음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가해자들의 행위는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선의의 자유 의지가 되는 셈이다.

지난 2월 장애를 가진 아들을 차에 태우고 소양호에 빠져 숨진 한 50대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은 구구절절 세상에 전해졌지만, 함께 숨진 아들의 존재는 명문대를 졸업해 성실하게 살아왔던 한 중년 사내의 삶을 힘겹게 한 원인으로만 희미하게 드러날 뿐 감쪽같이 절멸되었다.

3월 1일은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선열들이 독립 만세운동을 벌인 항일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지만, 세상 어느 곳에서는 가장 가깝고 의지했을 가족이나 조력인에게 살해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 민족은 자유를 빼앗길 것을 알면서도 빼앗겼지만, 이름없는 그들은 삶을 잃는 줄도 모르고 잃었다. 자유 의지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투쟁의 시간과 절멸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시간은 겹치지만 그 간극은 아득하기만 하다. 초봄의 드센 바람이 겨울의 절멸을 의미하지 않듯 희생자들의 죽음도 마침내,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더인디고 yslee506@naver.com]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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