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선의 무장애 여행] 봄에는 의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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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순주 섬 ©전윤선
▲의림지 순주 섬 ©전윤선

[더인디고=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이젠 완연한 봄입니다. 매화, 산수유, 목련은 벌써 폈습니다. 성질 급한 벚꽃도 볕이 잘 드는 곳에 고개를 내민 곳도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속도를 내는 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려는지 꽉 붙잡고 싶은 계절입니다.

이번 무장애 여행지는 내륙의 도시 제천의 오래된 의림지입니다. 제천 의림지는 산과 산에 움푹 들어간 곳에 만들어진 호수입니다. 의림지는 김제의 벽제골,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고대 담수 시설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입니다. 제천은 의림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호수의 서쪽)라는 뜻도 의림지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내토, 내제”라는 제천의 옛 이름도 의림지에서 비롯됐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의림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제방 남쪽 하단부 발굴 조사 때 발견된 기록에는 삼한시대나 최소 삼국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의림지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제천현감을 지낸 박의림의 이름을 따서 의림지로 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의림지는 오래된 저수지여서 중간에 보수공사도 여러 번 했습니다. 고려시대 박의림이 무너진 의림지를 개보축했고 15세기에는 고기잡이를 많이 해서 터진 제방을 홍윤성이 보축하고 충청감사 정인지가 감사했다고 합니다. 17세기에는 제천현감 홍중우가 개보축했고 1914년에서 1917년 사이 수문을 보수했다고 합니다. 이후 1972년 대홍수 때 붕괴된 서쪽 제방을 보수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축물이든 사람이든 나이가 들수록 자꾸 보수 공사를 해주며 사용해야 안전합니다. 사람도 평균수명이 늘고 식생활이 변하면서 성인병이 늘어도 의료 관리를 받으면 괜찮듯이 유병장수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건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닦고 조이고 기름 쳐가며 사용해야 의림지처럼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의림지는 큰 호수는 아니지만 삼한시대 당시로는 엄청난 규모의 호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워낙 큰 담수호가 많아서 의림지 규모가 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호수 둘레가 2킬로가 안 되는 작은 호수이지만 호수의 깊이는 13미터나 돼 효율적인 호수라고 합니다. 의림지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호수이기도 합니다. 옛날 그 큰 호수를 어떻게 물이 새지 않게 만들었는지 신기합니다. 지금처럼 기계가 발달한 시대도 아닌데 어떤 기술이 있었기에 당시로서 이렇게 크고 튼튼한 호수를 만들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답은 둑 하부에 발견된 ‘부엽공법’입니다. 제방 흙 사이에 수초나 나뭇잎 등 넣는 부엽공법은 토성 기저부나 저수지 하단부를 설치할 때 지반을 다지거나 성토의 일부를 구축하는 공법입니다. 부여나성, 풍납토성, 김제 벽골제를 만들 때도 쓰였던 오래된 건축 기술입니다. 물이 새거나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는 기술은 고도로 발달한 토목기술의 결정체라고 합니다.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心자 형으로 축조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호수이어서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곳입니다. 의림지를 둘러싼 제방 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어 예부터 제림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화가 ‘이방운’이 그린 작품 ‘시군강산삼선수석’에 나온 의림지는 명승지 여덟 곳 중에 한 곳입니다.

의림지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데도 전혀 문제없는 무장애 여행지입니다. 의림지에는 호수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섬은 “순주”라는 섬입니다. 순주는 순채라는 수초가 섬 주변에 많이 나서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임금님 수라상에만 올렸다는 순채는 나물로 먹고 국으로도 끓여 먹습니다. 순채잎을 오미잣국에 넣고 꿀을 타서 순채차로도 마십니다. 겨울 의림지에서는 임금에게만 바칠 정도로 맛있는 민물고기가 잡히기도 합니다.

▲수변데크 ©전윤선
▲수변데크 ©전윤선

순주는 의림지의 사진 촬영 장소이기도 합니다. 순주 섬을 카메라 속에 밀어 넣고 의림지 수변데크로 갔습니다. 수변데크는 용추폭포까지 이어지는 데크 길입니다. 경사면 없이 완만해서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시인이 되어 물 위를 걷는 것 같습니다. 데크길은 산비탈 쪽에 만들어져서 호수를 한 바퀴 돌 수 있게 해놨습니다. 데크길 끝지점에는 3색동굴과 3단분수를 지나가는 구간도 있습니다. 워낙 짧은 구간이어서 크게 와 닿지는 않습니다. 데크길이 끝나면 용추폭포입니다. 용추폭포 앞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오래된 카페가 있습니다. 이 카페는 “2007년 5월 어느 날”입니다. 카페 이름이 참 근사합니다. 레트로 감성이 물씬 나는 오래된 카페여서 정감이 갑니다. 카페 안으로는 턱이 있어 들어갈 수 없지만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며 따듯한 커피 한 잔의 여유도 호수를 즐기는 방법입니다. 바로 옆에는 “낮술 마시기 딱~ 좋은 곳”이라며 발길을 붙잡습니다. 낮술에 취하면 안 될 것 같아 꾹 참고 용추폭포를 둘러봅니다.

용추폭포는 2층 누각에서 내려다 봐야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계단이라서 접근할 순 없습니다. 용추폭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유리 전망대로 갔습니다. 유리 전망대는 아래가 훤히 보이게 강화유리로 만들었습니다. 강화유리라지만 무거운 전동휠체어 타고 지나는데 혹시나 깨지지 않을까 심장이 쫄깃했습니다. 물론 절대 안전합니다. 그럼에도 폭포 아래가 다 보여서 숨이 멎을 것 같고 식은땀이 납니다. 이 다리 이름은 유리 다리인데, 이름이 밍밍해서 ‘식은땀 다리’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줬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스토리텔링이 부족한 곳이 더러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풍경이고 멋진 여행지라고 해도 그곳에 이야기가 없으면 무미건조합니다. 작은 조형물이라도 의미를 담은 스토리텔링이 있으면 여행의 맛이 훨씬 풍성해집니다.

식은땀 다리 앞에는 1박2일 촬영지이기도 한 배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휠체어 사용인은 배를 탈 수 없지만 늘 그래왔듯이 맘 넓은 내가 봐주기로 했습니다. 이곳에도 식당과 야외 테이블이 있어 간단한 식사나 음료가 가능합니다.

의림지는 작지만 큰 호수입니다. 볼거리 먹을거리 체험거리가 아주 많은 문화공간입니다. 의림지에서는 계절마다 다양한 미디어파사드를 상영합니다. ‘빛을 품다’의 미디어파사드는 의림지 전설인 용과 며느리 바위 작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품다’는 제천과 한반도가 서로 닮아 그 기운을 받아 의림지를 수호하는 십이지상의 동물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계절마다 색다른 영상도 있습니다. ‘꽃의 무희’는 봄의 아침을 춤으로 표현해 의림지의 활기찬 기운을 표현하고 ‘정오의 그림’은 조선후기 화가 이방운이 그린 ‘의림지도’를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노을의 운율’은 가을을 상징하고 ‘별의 환상곡’은 겨울을 상징하는 작품입니다.

의림지 주변에는 유독 소나무가 많습니다. ‘백 년의 休’ 소나무는 의림지에서 백 년을 살면서 둑을 지키고 사람들에게 그늘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고사목이 되어서도 의림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려 한다며 “내 몸이 썩어 없어지는 그날까지 나를 찾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休로 남고 싶다”고 합니다.

둑 한가운데 있는 영호정이라는 정자에서는 둑 아래 풍경이 가장 잘 보입니다. 영호정은 조선 순조 때 이집경이 세운 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후손인 이범우가 1954년 고쳐지었습니다. 이범우는 삼일운동 때 제천의 만세 항쟁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이강년도 영호정에서 정치를 논했습니다. 이강년은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이 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한 인물입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칠조약의 체결, 군대의 강제 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정미의병 창의 당시 제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이강년이 제천 천남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영호정에서 부하 장수들과 정치를 논하기도 했습니다. 팔각지붕이 근사한 이층 누각의 영호정은 굵직한 역사를 견뎌 냈습니다.

▲우륵정 ©전윤선
▲우륵정 ©전윤선

우륵정과 우륵대 쪽으로 발길을 이어갔습니다. 신라의 가야금 명인 우륵은 노을 지는 의림지에서 가야금을 탔다고 합니다. 우륵정은 지금도 인생사진을 남기는 포인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눈은 같은가 봅니다.

▲누리정원 ©전윤선
▲누리정원 ©전윤선

의림지 역사관 앞에서 출발해 우륵정까지 한 바퀴 도는 동안 의림지의 시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림지 역사관 앞에는 누리정원도 있습니다. 누리정원은 역사관 너른 마당 한견에 만들어졌습니다. 데크로 길을 만들어서 정원 곳곳을 둘러보는데 방해물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정원에서 뛰어놀고 어른들은 누워서 책을 읽거나 봄볕을 쬐며 광합성을 합니다. 제천시내 중심에는 일곱 개의 봉우리인 칠성봉이 있습니다. 칠성봉은 신기하게도 제천땅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어 옛 제천 사람들은 칠성봉을 찾아 소원과 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누리 공원은 그 뜻을 상징화해서 일곱 개의 문과 일곱 개의 길을 만들고 각문을 지나 평온하게 누워서 쉴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입니다. 정원은 심심하지 않게 아기자기한 작품을 전시해 놨습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 하얀 반달처럼 누리 정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보라색 그러데이션으로 물드는 초저녁쯤 의림지의 노을이 여행객을 배웅해 줍니다. 이제 여행을 마칠 시간입니다. 그렇게 어제의 오래된 시간이 의림지를 지나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향해 나갑니다.

무장애 여행 팁

  • 가는 길: 제천 역에서 제천 장애인 콜택시(전화 043-642-0151)
  • 접근가능한 식당: 의림지 주차장 쪽 의림지 막국수, 의림지 육개장 곰탕
  • 접근가능한 화장실: 의림지 주차장, 의림지 역사박물관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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