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짜장면’이라는 세상의 맛

0
152
▲어린 시절 짜장면은 억울한 폭력을 잊기 위한 진정제였으며, 갇힌 곳에서 상상했던 세상의 달콤한 맛이기도 했다. Ⓒ unsplash
▲어린 시절 짜장면은 억울한 폭력을 잊기 위한 진정제였으며, 갇힌 곳에서 상상했던 세상의 달콤한 맛이기도 했다. Ⓒ unsplash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옅은 미색의 면발 위에 올려진 뜨거운 짜장 소스, 나무젓가락을 쪼개 쓱쓱 비벼 한 젓가락 수북하게 떠 입안에 밀어 넣으면 이내 짜고 단 특유의 맛이 혀끝을 자극한다. 가끔 콩알만 한 고깃점이라도 어금니에 왈칵 씹히기라도 하면, 세상에 그 어떤 산해진미에 비할까 싶은 것이다.

어린 시절 내게 짜장면은 특별한 음식이었다. 지금도 짜장면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굳이 찾아야 하는 음식이라는 고집은 여전하다. 요즘에야 짜장면 한 그릇쯤은 바쁜 시간을 쪼개 허기를 달랠 요량으로 먹거나 심심풀이 간식으로라도 대수롭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10여 년 남짓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시설 생활이 몸에 밴 탓인지 내게 짜장면은 여전히 특별하다. 요즘처럼 수용시설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해석이 있었던 때도 아니고 인권에 대한 명확한 사회적 인식조차 투미했던 1970년 중·후반에는 시설 입소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꿈이었다. 시설에 입소해야 수술도 받으면서 그나마 중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다닐 수가 있었고, 이후에는 시계 수리나 TV 수리 등 기술을 익혀 밥벌이나마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족들은 장애를 가진 자녀가 시설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이런저런 뒤치다꺼리에서 놓여날 수 있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시설에 입소해 생활했던 나는, 여간 곤혹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3년을 넘게 계속된 수술의 고통도 꽤 견디기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욕지거리와 매질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아침 기상과 저녁 점호 등 온갖 규칙이야 단체 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절차라고 해도 무시로 날아드는 주먹질은 당최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를테면 기숙사에서 사소한 도난 사고라도 터지는 날에는 단체로 얻어터질 각오를 해야 했다. 군기반장을 자처했던 개망나니 몇은 백여 명 남짓한 어린아이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는 범인을 잡는답시고 이런저런 협박과 엄포로 자수할 것을 종용하곤 했다. 이도 마땅치 않으면 몇몇 아이들을 불러내 본보기로 매질했는데 대부분 고아거나 입소 이후 가족들의 면회가 끊긴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범인이 색출되지 않으면 단체 매질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는데, 부모가 제법 그럴듯한 직업을 갖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아이들과 장애가 심한 아이들은 예외였다. 이도 저도 아닌 시골 출신에 미렷한 천덕꾸러기였던 나는 단체 매질에는 어김없이 끼여 치도곤을 당하곤 했다. 매질 방법도 특이했다. 당시 ‘쬬꼬릿’으로 불렸던 한 매질 방법은 손가락을 모두 오므리게 해 손끝을 숟가락 뒷등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열 대 남짓 맞았는데 손톱 끝이 깨지고 들떠 며칠을 앓아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손끝에 남을 만큼 ‘쬬꼬릿’은 가혹했지만, 눈에 띄는 상처가 남지 않아 매질을 감출 수 있는 간특한 매질이었다.

나는 억울하게 맞았다는 분한 마음을 삭이기 위해서 의기투합한 아이들과 몰래 짜장면을 시켜 먹고는 했다. 당시 한 그릇에 500원이었으니 그리 녹록한 값은 아니었다. 별수 없이 한 달에 한 번쯤 학용품이나 비누, 치약 등을 사 쓰라고 집에서 보내준 가욋돈이 짜장면값으로 탕진되었다. 시설에서 고아들에게 배급하는 물품을 얻어쓰는 대신에 짜장면값은 내 몫이 되곤 했으니 나름 합리적인 물물교환이었던 셈이다.

짜장면을 먹는 일은 그야말로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우선 작전에 동의한 아이들을 모아 짜장면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시설 정문을 지키는 수위 아저씨나 기숙사 사감들 혹은 군기반장들에게 들키면 또 매타작이 뻔하니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장소여야 했다. 나는 주로 시설 입구 왼편으로 들펀하게 조성된 잔디밭 끝 한쪽, 절제 울타리가 얼추 끝나는 곳을 선호했다. 그곳은 숲이 제법 울창했고 수위실 쪽으로 제법 큰 바위 하나가 버티고 있어 어린 것들 서넛이 몸을 잔뜩 움츠려 숨기에는 맞춤했을뿐더러 배달된 짜장면을 받기에도 용이했다. 다만 휠체어의 접근이 쉽지 않아 잔디밭 초입부터 박박 기어야 했는데 그런 수고쯤이야 짜장면 맛으로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철제 울타리 개구멍으로 받은 짜장면 한 그릇을 먹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분 남짓.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다음 빈 그릇을 개구멍으로 배달원에게 건네고 다시 잔디밭을 기어 휠체어에 오를 때까지 5분이면 충분했다. 물론 이 작전은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다. 배달원 오토바이 소리에 낌새를 눈치챈 수위 아저씨의 플래시 불빛에 고스란히 노출되거나 기숙사 사감들에게 들켜 체벌을 대신했던 군기반장들에게 귀싸대기를 맞기도 했지만, 시설에 있는 내내 나는 그 짓을 그만두지는 못했다.

글쎄, 왜 그토록 짜장면의 맛에 집착했는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나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당시에 나는, 아니 그곳에서 살아냈던 우리는 늘 허기져 있었다. 찐 보리밥에 짠지 반찬 세끼를 아무리 퍼먹어도 뱃속에 거지가 들었는지 늘 배가 고팠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 한편에는 세상에 나가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의 허기도 심했던 듯하다. 어쩌면 어린 우리는 개구멍으로 받아먹었던 짜장면의 맛을 시설 밖 세상의 맛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갇힌 곳에서만 세상을 구경만 해야 했던 그 답답함과 무력감을 세상의 음식인 짜장면의 그 짜고 다디단 맛으로나마 위로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장애인의날에는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 거뜬히 비웠다. 어린 시절 몰래 숨어 물 마시듯 단숨에 먹어 치웠던 맛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한 시절을 용케 살아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나마 넉넉해지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맛이었다.

[더인디고 yslee506@naver.com]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승인
알림
66211bd174926@example.com'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