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찬의 기자노트]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부족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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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위에 펜이 놓여진 사진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서는 다수자가 정해놓은 틀에 소수자가 맞추는 게 아니라, 소수자의 특성에 맞는 지원이 무엇인지부터 찾아야 한다. ©박관찬 기자

[더인디고=박관찬 기자] 지난 주에 만난 북한이주민 22년차 청년 정서윤 씨는 북한에서 온 아이들이 교육받는 과정을 기자에게 설명해줬다. 북한에서 배우고 사용하던 언어가 우리나라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용하는 교재는 그대로 두고, 북한이주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재구성한 교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이 보다 잘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맞춤형’으로 교재를 제작하여 제공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들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의도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다름과 다양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이곤 한다. 위의 경우만 해도 북한말을 쓴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따갑도록 힐끔거리고 눈치보는 시선을 받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북한’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런 잣대를 갖다대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진 잘못된 프레임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장애’다.

최근 장애통합어린이집에 모니터링을 간 교사가 겪은 사례가 그렇다. A 교사가 제작한 학습지는 장애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해당 학습지를 활용하는 수업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니터링에 참여한 교사가 학습지 파일을 주면 장애학생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내용으로 만들어서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A 교사는 학습지가 자신이 만든 순수창작물이기 때문에, ‘저작권’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어린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데, 유명한 작곡가가 작곡한 곡을 단번에 연주하기 어렵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제공한 교재가 ‘어린이 명곡집’이다. 유명한 작곡가가 작곡한 ‘원곡’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맞춤 제작한 교재인 것이다. 이건 저작권 위반이 아닌, 배우는 사람에게 맞춘 교재 제작인 것이다.

할리우드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우리나라에도 개봉했다. 그런데 영어회화가 능숙한 사람이 아닌 이상은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며 영화를 감상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스크린 하단에 배우들의 대사가 한국말로 등장한다. 이는 영화 제작사에서 만든 대본이나 시나리오의 저작권을 위반한 것일까? 아니다. 다른나라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맞춤형’ 자막을 따로 제작한 것이지 이런 걸 저작권이라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는다.

학급에 장애학생이 있으면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통합된 학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사가 해야 하는 노력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장애학생이 지닌 장애의 정도와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냥 교실에 비장애학생과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통합교육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 저작권이라는 단어를 운운한다면 그 학급에 있는 장애학생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 걸까.

우리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가장 큰 문제점은 소수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접근하지 않고, 다수가 정해놓은 틀에 소수가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편의제공을 신청할 경우, 편의제공 의무자는 ‘시각장애’라고 하면 점자로 된 서류나 ‘무조건 크게’ 확대한 서류를 제공하면 끝인 줄 안다. 하지만 전맹인 시각장애인 중에도 점자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또 시야와 시력의 정도에 따라 볼 수 있는 정도가 천차만별인 저시력 시각장애인은 글자를 무조건 크게 한다고 해서 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청각장애인이 통역서비스를 신청한다고 해서 수어통역사가 제공하는 수어통역을 다 이해하면서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수어를 잘 모르는 청각장애인이 있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수어보다는 문자통역을 더 선호하는 청각장애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각장애인=수어’라는 잘못된, 어찌 보면 제도적으로 정해져 있거나 다수에게 많이 알려진 ‘수어’라는 존재 덕분에 청각장애인에게는 수어통역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걸로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기, 어느 곳이든 역사를 보면 반드시 다수자와 소수자가 있다. 물론 다수자에 의한 소수자 억압과 탄압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가 존재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거치면서 우리가 배운 게 바로 인권감수성과 다름,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다. 모두가 더불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수가 행하는, 다수가 정해놓은 것에만 맞추는 게 아닌, 소수자의 환경 또한 면밀히 살피고 검토해야 한다.

즉 단 한 명의 소수자라도 공동체의 구성원과 함께하기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공동체는 이를 검토하여 지원해야 할 것이다. 다수가 알고 있는, 다수가 정해놓은 틀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진정 소수자가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귀 기울여야 한다.

[더 인디고 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대구대학에서 장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첼로를 연주하며 강연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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