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1960년대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는 흑인 차별이 매우 심했다. 흑인은 백인과 구분된 병원에서 태어나 흑인학교에만 다녀야 했다. 공원에는 백인만 들어갈 수 있어서 흑인들은 언제나 길 위에서 놀아야 했고,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는 단 하나의 계산대를 이용해야만 했다.
백인과 같은 곳에서 식사하는 것도 위법이었기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도 흑인구역에 가기 전까지 참아야만 했다. 교회도 흑인교회에만 가야 했다. 민주주의의 상징 투표권은 있을 리 만무했다. 가장 큰 문제는 흑인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라고 법률을 만들어 놨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마틴 루터 킹은 1962년 늦여름, 올버니 형의 시위운동을 버밍햄에서 진행하기로 한다. 올버니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운 킹과 동료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닥쳐올 투쟁 C(Confront ation)을 계획했다. 1962년에 C계획을 진행키로 하였으나, 전략적인 문제로 인해 연기했다.
1년이 지난 1963년, 수천 명의 흑인이 경찰 곤봉에 두들겨 맞고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린다. 경찰견에 물리고 물세례를 맞으면서도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소식은 뉴스를 타고 삽시간에 전국에 알려졌다. 이후 흑인에 대한 보복행위가 광범위하게 벌어져,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주 방위군에게 흑인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해야만 했다.
당시 킹은 시민 저항운동을 저지해달라는 정부 요청을 거절하고 체포되어 독방에 감금된다. 다음 날 아침 킹은 신문을 보다가 미국 주요 교파 백인 성직자들이 낸 광고를 보게 된다. 광고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좌파’, ‘공산주의자’, ‘극단주의자’, ‘범법자’, ‘무정부주의자’로 낙인찍고, 법적·제도적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마치 전국장애인차별철폐투쟁연대의 투쟁에 반응하는 한국 정부와 공공기관의 모습과 묘하게 닮았다.
이에 킹은 편지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여러분은 버밍햄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애석하게도 시위를 야기한 조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결과만을 따지면서 그 결과를 야기한 원인은 거들떠보지 않는
피상적인 사회분석에 만족하는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버밍햄에서 시위가 발생한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더욱 애석한 일은 버밍햄 시(市)의 백인 권력구조가
흑인사회로 하여금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폭력운동에는 네 가지 기본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사실들을
수집하는 단계, 협상의 단계, 자체 정화의 단계, 그리고 직접 행동의 단계입니다.
버밍햄에서는 이 모든 단계가 진행되었습니다.
버밍햄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버밍햄은 미국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도시입니다.
– 마틴 루터 킹,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 pp.104~105 –
킹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백인 중심 권력 구조로 인해 차별당하는 흑인들이 현실을 바꾸어내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흑백차별 법령들은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해치기 때문에 부당하다’라고 지적하며 ‘부당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어떤 법은 준수하고 어떤 법은 위반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굳이 답하자면 법에는 정당한 법과 부당한 법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정당한 법은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법을 준수하는 것은 법적 의무일 뿐 아니라 도덕적 의무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도 역시 도덕적 의무입니다.
‘저는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성 어거스틴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정당한 법은 도덕법이나 신(神)의 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부당한 법은 도덕법에 어긋나는 법입니다.
인격을 고양하는 법은 정당하고, 인격을 타락시키는 법은 부당한 것입니다.
흑백차별 법령들은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해치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부당한 것입니다.
부당한 법은 수와 힘의 측면에서 다수에 속하는 그룹이
소수 그룹에 대해서 준수를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구속받지 않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법은 다수그룹 자신이 자발적으로 준수하면서
소수 그룹에 대해서 준수를 강요하는 법입니다.”
– 마틴 루터 킹,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 pp.111~113 –
또한, 킹은 버밍햄에서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에 대하여 극단주의라고 비판하는 성직자들을 향하여 아래와 같이 자기 뜻을 분명히 밝힌다.
저는 처음에는 극단적이라는 평가를 듣고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점차 극단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극단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는 분이었습니다.
아모스는 극단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분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극단적으로 주님의 복음을 추구하는 분이었습니다.
마틴 루터와 존 번연, 에이브러햄 링컨과 토마스 제퍼슨도
역시 극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극단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점에서 극단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 마틴 루터 킹,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 p.121 –
이처럼 킹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당한 시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극단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시위 그 자체보다 시위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어떤 것을 해소하려는 것인지 따져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흑인들의 인권이 향상되지 않는 이유가 노골적으로 흑인 차별을 일삼는 ‘백인시민평의회’, ‘KKK단(백인 비밀결사조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질서 유지만 신경 쓰는 백인들에게도 있다고 주장한다. 적극적으로 차별을 일삼는 혐오주의자들보다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혐오와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달라는 호소가 아닐까 싶다.
[더인디고 THE INDI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