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나 아니면 안 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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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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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있잖아, 하진이 매일 챙겨야 할 건 체육센터 양말이야. 일반 양말은 미끄러지니까 꼭 흰색이랑 연두색 섞인 미끄럼 방지용 양말 파우치에 따로 넣어줘. 화목은 수영하니까 수영복, 수영모, 수경 꼭 챙겨줘야 해. 집에 오면 가방 속 양말 꺼내서 꼭 세탁실 가져다 두는 거 잊지 말고…”

나는 남편 눈치를 보면서 ‘꼭’이란 말을 반복하며 또박또박 알려줬다.

“와? 내일 당장 자기 어데 가나?”

“응? 아니, 지금부터 한두 가지씩 자기가 할 일 알려주려고.”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말이야,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카이. 자신이 하는 일을 왜 남들은 못한다고 생각하노? 그거는 오만이야 오만. 정치판도 봐라, 지만 잘났다고 한자리 쥐면 끝까지 버티고 또 하고 또 하면서 권력을 쥐고 안 놓으니까 나라가 이 모양 아니가…”

가볍게 한 말에 나라 타령까지 하는 남편이 좀 오버다 생각하면서 웃고 말았다.

6년 전 가을, 지인 초청으로 오사카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자폐성장애인 아들을 친구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딸이 반대했다. 누나가 있는데 왜 동생을 남에게 맡기냐며 본인이 돌보겠다고 했다. 지금에야 많이 점잖아졌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아들은 자해가 심했고 의사소통이 어려워 울음으로 떼쓰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아들을 딸에게 맡기고 여행이라니 내키지 않았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딸을 믿어보기로 했다. 사흘 동안 먹을 반찬과 국을 준비하고 밥은 해 먹도록 했다. 센터 다니던 아들의 준비물을 딸에게 일러주고 가급적 집에서만 있으라고 했다. 밖에서 보이는 아들의 과잉 행동에 딸이 당황하고 힘들까 봐 그나마 집에서는 괜찮으니 그리 말해뒀다. 딸은 알았다고 하더니 여행 중 가족 대화방에 아들 사진을 자주 올려줬다. 둘이 외식도 하고 카페에서 차도 마시는 평범한 20대 남매의 평온한 일상을 보고 우리 부부는 울컥했다. 그동안 지레 겁먹고 딸과 아들만의 외출을 꺼렸는데 늘 늙은 부모와 동행하던 곳에 비록 누나지만 또래의 이성과 함께하는 시간을 아들은 양껏 즐기는 표정이었다. 사흘 동안 한 번도 자해하지 않았고 울음떼로 딸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는 아들이 대견하면서 남매가 서로 최선을 다해 우리 없는 시간을 잘 보낸 것 같아 대견했다. 아들 건사하는 게 엄마인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조금씩 버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딸이 가을에 모녀 여행을 준비 중이다. 가까운 곳을 원했으나 주야간 근무일을 잘 맞추면 열흘 휴가가 가능하다고 튀르키예에 가자고 한다. 튀르키예는 내게 ‘터키’로 더 익숙한 나라다. 터키가 영어권에서는 겁쟁이를 뜻하는 거라 자국민의 요청으로 용감하다는 의미의 ‘튀르키예’로 변경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내가 갈 수 없는 먼 나라로만 생각했다. 해외여행이라곤 아들이 사나흘 캠프 갔을 때 두세 시간 비행해서 갔던 일본, 대만, 중국, 홍콩뿐이다.

“거기 비행시간만 10시간인데 나 시러…열흘을 니 동생 우짜고 내가 집을 비우냐?”

남편은 나를 나무랐다. 딸이 큰맘 먹고 준비하는데 그냥 가지 뭘 따지냐며 자신이 아들 잘 건사하고 집안일 다 할 거니 아무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한다. 아들 키우면서 청소년지도사 연수로 나흘 집 비운 것 말고 그 이상의 날을 비운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열흘이라는 말에 여러 가지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마음이 불안하면 즐길 수 없음을 잘 알기에 가족 모두가 함께라면 열흘 아니라 더 긴 시간도 좋겠지만 남편과 아들만 남겨둔다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랬는데 결국 남편의 설득에 결정하고 나니 지금부터라도 남편에게 하나씩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35년 살면서 세탁기 한번을 안 돌려 본 남편이 빨래를 어찌할까 싶기도 하고 건조기 사용을 잘 할 수 있을까 의심도 든다. 그나마 밥은 몇 번 하게 해서 잘 하니 다행, 반찬은 1도 못하니 사 먹게 해야겠다. 무엇보다 아들 챙기는 일만 실수 없이 하면 되는 거니 그것만 잘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어이, 사람을 바보로 아나, 설마 내가 세탁기, 건조기 사용 몬하긋나? 아무 걱정 말고 준비 잘하고 잘 댕기온나, 고마.”

오래전 딸에게 아들 맡겼을 때보다 어째 남편이 더 미덥지 않다. 나의 이런 기우가 모녀 여행을 취소하기 전에는 아무 소용없음을 안다. 아직 기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남편을 잘 가르쳐서 살림요정으로 만들어야겠다. 하루 딱 한두 가지만 알려줘야지 두 개 이상이면 잔소리로 들릴 테니 수위 조절 잘하면서.

20대 후반 장애인 아들과 살면서 열흘간 아들을 안 보고 지내다니, 생각할수록 꿈만 같다. 내게 이런 시간이 주어질 줄 예전엔 상상도 못 했다. 남편에게 살림 맡기고 여행하는 것 역시 내 사전에 없던 일이었다.

살다 보니 예상치 않았던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 나의 과거는 참으로 험난했다. 어쩌면 환갑 넘은 나이의 내게 이 정도 호사는 당연할 수도 있지만 장애 가족으로서의 삶을 돌이켜 볼 때 행운이고 축복이다.

내가 아니어도 우리 가족의 일상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믿음, 내겐 희망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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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영쌤 어려운 일도 가볍게 해내시고, 힘든 상황도 밝게 비추시는 모습이 항상 멋지고 대단하다 생각됩니다.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

늘 진솔하고 재미난 글 감사해요
덕분에 지친 하루 힐링으로 마무리합니다
딸보다 남편이 못 미덥다는 대목에서 입꼬리 올리며 공감 ^^
모녀가 기구타고 오르는 튀르키에의 하늘이 찬란하길, 소소하게 꿈꾸는 그대의 희망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