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찬의 기자노트]사람들을 속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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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레슨하는 모습 사진
최근 선생님의 레슨 강도가 부쩍 올라가면서 덩달아 기자의 첼로 연주에 대한 동기부여도 더 높아지고 있다. ©이담사진실 이관석

[더인디고=박관찬 기자] 김영아 선생님으로부터 첼로 레슨을 받은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선생님은 단 한번도 기자의 첼로 연주의 실력적인 부분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한 적이 없다. 기자가 첼로를 전공하는 것도 아니고, 콩쿨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시청각장애라는 환경에서 첼로를 연주하기에 배우고 싶은 곡을 레슨하며 곡의 ‘완주’ 자체에만 의미를 뒀다.

그런데 생애 두 번째 연주회를 석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요즘 선생님의 레슨에 임하는 자세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이전보다 좀 더 레슨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는 느낌일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레슨 중 기자가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가장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올해 연주회에서 메인곡으로 준비하고 있는 게 W. H. 스콰이어의 ‘타란텔라’다. 기자의 실력으로는 지금까지 배워본 곡 중에 가장 길고, 빠르고, 한마디로 정말 어려운 곡이다. 처음에 레슨 몇 번 해보고 선생님이 ‘이 곡은 내년이나 내후년에 해도 된다’고 하실 만큼 기자에게는 너무 버거운 곡이었지만, 한동안 ‘타란텔라’에 올인하며 연습한 끝에 올해 연주회에서 선보이기로 했다.

이번 달 초 레슨에서 드디어 ‘타란텔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기쁘고 벅찬 마음을 가득 안고 레슨 시간에 선생님 앞에서 ‘타란텔라’를 연주했는데,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기자의 핸드폰에 있는 음성인식기능 어플에 변환되어 나온 글자를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지금 연주한 걸 피아노로 치면 바이엘 수준이거든요.”

바이엘이라니. 사람들이 피아노를 어디까지 배웠냐고 이야기 나눌 때 주로 체르니 100번, 체르니 30번, 체르니 40번 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바이엘은 체르니에 들어가기도 전에 배우는 완전 초보자들이 하는 교재다. 지금 기자가 연주한 ‘타란텔라’가 바로 그 바이엘 수준이라는 거다.

만약 첼로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자에게 ‘바이엘’ 이야기를 했다면 굉장히 언짢고 속상했을 것 같다. 시청각장애가 있어서 연주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스스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해주는 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잘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조건에서 첼로를 연주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외적인 평가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냥 본인이 즐거우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에 생애 첫 연주회를 하고 연주 경력도 늘어나면서 기자도 모르게 실력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된 게 사실이다. 특히 연주회 사업에 선정되면서 작년과 같은 수준이 아닌, 작년보다 더 발전된 연주회를 준비하고 싶은 욕구가 크다. 기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그런 마음을 아주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하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이야기라도 선생님이 해 주시는 이야기는 오히려 더욱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만큼 선생님이 레슨해주시면서 이뤄낸 결과가 있기에 앞으로의 연주가 기대된다. ©이담사진실 이관석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바이엘’ 이야기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레슨해주시면서 기자에게 해주신 말씀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다. 기자도 작년 연주회에서 아무런 발전 없이 그냥 연주회 한 번 더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으니까. 기자가 더 각성할 수 있도록, 더 발전된 실력을 선보일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주시는 선생님이 고마웠다.

추석 연휴 후 첫 레슨 때는 갑자기 레슨 중간에 선생님이 기자에게 레슨 ‘소감’을 물어보셨다. 2년 넘게 레슨하며 기자에게 레슨 소감을 물어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날은 기자가 어떤 클래식 곡을 연주했는데, 선생님이 ‘클래식’이 아니라 ‘동요’ 같다고 하셨다. 그만큼 클래식을 연주할 때 나오는 활의 테크닉과 비브라토 등 첼로의 기술적인 부분이 없고 그냥 활이 왔다갔다 하면서 곡의 ‘완주’ 자체에만 의미를 둔 연주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소감을 물어본 건 그만큼 요즘 레슨 중에 기자에게 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들이 이전과 비교해 정말 강도가 있는 단어들이 많아서 혹시나 기자가 상처 받을까봐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기자는 전혀 상처 받지 않았고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이 이렇게 강도 높게 레슨해주시는 걸 반겼다.

사실 기자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감동과 응원의 마음을 전해준다. 시청각장애라는 요소가 감안되는 연주이기에 이만큼 연주하는 것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하며 박수를 보내준다. 한편으로는 기자도 첼로를 연주할 때의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장애인식개선이라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김영아 선생님을 만나면서 기자도 욕심이 생기고 있다. 포지션 이동, 하모닉스, 비브라토 등 이전에는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걸 배우면서 정말 발전하고 있다는 걸 체감했고, 또 연주회라는 확실한 목표가 생기면서 더 잘 해내고 싶은, 사업의 실적이라는 걸 내고 싶은 의지도 강하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시청각장애 중 특히 청각장애는 더 어려운 곡을 연주할수록 분명한 한계를 느낀다. 기자는 소리를 못 들으니까 활로 첼로의 진동을 느끼며 연주하는데, 요즘 자주 연주하는 클래식 곡은 진동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빠른 곡이 많다. 특히 ‘타란텔라’가 그렇다. 기자는 분명히 정확하게 음정을 짚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계속 ‘다시’를 수어로 하신다. 빠른 곡이라도 정확하게 음정을 짚고 소리를 내며 연주해야 하는데, 기자가 음정을 짚었어도 정확하게 소리를 내며 연주했는지를 못 들으니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제 올해 연주회까지 석 달도 남지 않았다. 올해 연주회 마지막에 연주하게 될 메인곡 ‘타란텔라’는 어떤 무대가 될까. 김영아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을 ‘속이자’고. 시청각장애라는 걸 감안하지 않고 정말 완벽하게 훌륭한 그런 무대를 선보이게 된다면 진짜 사람들을 속이게 될지도 모른다. “저 사람 시청각장애인 맞아?”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솔직히 선생님도, 기자도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다.

어디까지가 한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선생님이 동기부여를 주시며 레슨해 주시는 만큼 남은 기간 동안 충분히 발전된 실력으로 연주회를 준비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까지 선생님의 레슨으로 이뤄낸 결과물을 보면 확신할 수 있다. 비록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이지는 못할지라도 1에서 10까지 범위를 정한다면 9까지만큼은 속이고 싶다. 요즘은 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거다.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더인디고 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대구대학에서 장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첼로를 연주하며 강연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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