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선의 무장애 여행] 세월이 흐른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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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전경 ⓒ전윤선
▲한옥마을 전경 ⓒ전윤선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 전윤선 집필위원

[더인디고=전윤선 집필위원] 여기 마음속에 모든 말을 다 꺼낼 순 없지만 아름다운 기억들은 스스로 소곤댄다. 세월에 등 떠밀려 놓치면 안 되는 꿈 꾸던 날들이 보일 듯 말듯 안개 속 풍경을 자극한다. 지금은 쉼표 주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여행으로 쉼표를 찍는다.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여행은 인생의 또 다른 쉼표다.

그곳엔 과거와 오늘의 시간이 흘러간다. 말끔히 지켜낸 오래된 미래는 세계인의 발길로 이어지고 정갈한 골목의 담벼락은 황금빛으로 짙어진다. 선비의 절개 같은 기와지붕은 귀티가 줄줄 흐른다. 전주 한옥마을은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주역에서 내려 전동휠체어를 타고 한옥마을까지 냅다 달리기로 했다. 저상버스도 있고 장애인 콜택시도 있지만 거리가 멀지 않아 이 정도쯤이야 라이딩 삼아 달리며 주변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걷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느리게 따라온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걸으며 이곳 사람들은 어찌 사는지 궁금증도 해결한다. 워킹화를 신은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전동휠체어는 무장애 여행에 최적화된 이동 수단이어서 든든하다. 전주역에서 전동성당까지 스마트폰 길 안내 앱으로 거리를 측정하니 5.2킬로다. 걷기 옵션을 선택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면 30여분 쯤 지나 한옥마을 입구인 전동성당 앞에 도착한다.

▲한옥마을 골목 ⓒ전윤선
▲한옥마을 골목 ⓒ전윤선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시 풍남동과 교동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한옥이 칠백여 채나 밀집되어 있어 조선시대로 회귀한 것 같다. 열린 관광지로 조성되면서 보행로를 개선해 이동 시 불편함이 없고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마을 곳곳에 장애인 화장실이 있고 장애인 주차장, 건물 입구 무단차, 경사로 등이 잘 갖춰져 있어 누구나 제약 없이 여행할 수 있다. 태조로 골목부터 둘러봤다. 카페, 식당, 소품샵, 한복대여집, 간식코너까지 다양한 상가들이 밀집해 있어 심심할 틈이 없다. 한복과 개화기 의상, 교복을 빌려 입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청자4절 나눔 접시 ⓒ전윤선
▲청자4절 나눔 접시 ⓒ전윤선

태조로를 걷다 보면 전주공예품 전시관을 만난다. 공예품 전시관은 부채를 비롯해 도자기, 스카프 등 소소한 소품들이 가득하다. 바람과 함께 노니는 풍류 전시에는 네모난 부채, 둥근 부채 접이식 부채까지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부채로 가득하다. ‘한국적 살림살이 담고’ 전시는 전통을 살린 찻잔과 접시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쑥색의 청자4절 나눔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으면 왠지 격식을 갖춘 귀족이 될 것 같다.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마당으로 나와 하늘에 걸려 있는 색동 부채를 천천히 쳐다봤다. 햇볕을 가린 부채 덕분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의 움직임이 보인다. 자유로운 구름은 어디로 갈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어디까지 일까.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묵묵히 걸었던 그 길은 아직도 거칠고 험한 길이다. 무장애 여행은 추상적인 마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접근성이 필요하다.

바로 옆엔 오목대 전통 정원이다. 오목대 전통 정원은 한국의 토종 식물과 솟대, 영지, 취병 등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정원이다. 소박한 자연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쉼터이자, 공연과 전통 놀이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솟대 세 마리가 하늘을 날고 담장 아래 작은 석상은 익살맞게 풀밭에 앉아 있다. 오목대 정원은 오목대 둘레길로 이어진다. 오목대에 오르면 곡선의 용마루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한옥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목대도 열린 관광지로 조성됐지만 오르는 길이 가팔라서 휠체어 탄 나로서는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 전망대 카페에서 한옥마을 전경을 보기로 했다. 전망대 카페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누구나 접근 가능하다. 전망대 카페에서 본 한옥마을 풍경은 입이 떡 벌어져 말문을 잃게 한다. 이렇게 많은 한옥이 모여 있으니 풍경에 압도된다. 숲 안에서는 나무만 보이지만 숲 밖에서는 전체가 보인다. 한옥마을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마을의 전경으로 감동한다.

▲태조로(좌)와 황손의 집 승광재(우) ⓒ전윤선
▲태조로(좌)와 황손의 집 승광재(우) ⓒ전윤선

카페를 나와 황손의 집으로 발길을 옮겨갔다. 황손의 집 승광재는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승광재는 대원군의 증손자이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직계손인 이석님이 사는 곳이다. 승광재는 전주 시민들의 뜻에 따라 황손인 이석님이 이곳에 거처하게 됐다. 이석님은 황실에 대한 전통과 문화 역사에 대한 강연을 승광재에서 한다. 그러니 승광재는 다양하고 특별한 문화 공간이다. 이석님을 창덕궁 낙선재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이석님은 하얀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인자한 미소로 나와 사진도 찍었다. 그때의 만남이 승광재에서 재현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지만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연이 닿았으니 언젠가 또 이석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옛 고택이 그렇듯 대문 앞에는 계단 3개가 태산처럼 버티고 있어 휠체어 탄 나로서는 승광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래,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맘 넓은 내가 참아 준다, 아마도 내가 죽고 나면 몸속에 사리가 한 말은 있을 거다. 장애인도 사회적 장벽과 인식의 부재로 무던히도 절재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간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러니 내 몸속에 사리가 한 말? 아니 한 가마는 있을 것 같다.

지친 기색 없이 오래된 시간을 탐험했다. 그 시간을 가꾸지 않았더라면 방치된 채 발길이 끊기거나 뜸했을 것 같다. 잊히지 않고 기억하는 건 시간만이 아니다. 그곳에 묻힌 추억을 꺼내 지금을 바라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래된 미래가 전주 한옥마을에서 빛나고 있었다.

▲오목대 전통정원(좌)과 장애인화장실(우) ⓒ전윤선
▲오목대 전통정원(좌)과 장애인화장실(우) ⓒ전윤선

무장애 여행 팁

  • 가는 길: 전주역에서 전북 장애인 콜택시 즉시콜 이용(전화: 063-227-0002)
  • 접근가능한 식당: 한옥마을 곳곳, 남부시장
  • 접근가능한 화장실: 전동성당, 성당 앞 식당, 공예품 전시관 등 곳곳

[더인디고 THE INDIGO]

사)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대표. 무장애관광인식개선교육 강사. 무장애 여행가로 글을 쓰며 끊어진 여행 사슬을 잇는 활동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접근 가능한 여행은 모두를 위한 평등한 여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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