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최병호 집필위원] 근육병을 포함한 신경근육질환이 중증으로 진행되면 근력이 상실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심장과 호흡, 소화와 골밀도, 연하 기능이 전반적으로 떨어진다. 그중에서 연하는 삼키는 능력을 말하는데, 씹는 힘과 턱의 유연성이 함께 약해지며 식사하는 걸 어렵게 만든다.
20대 후반부터 입을 크게 벌리는 게 힘들어졌고, 차츰 줄어들어 이제는 20% 정도만 겨우 가능할 만큼 작아졌다. 더욱이 음식이나 음료를 삼키다가 사레에 걸리거나 이물감에 성가실 때가 많아졌다. 그래서 고기와 채소는 푹 삶거나 찌지 않으면 먹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알고 지내는 근육장애 환우들의 근황을 전해 듣는데, 환자용 영양식으로 끼니를 채우거나 그마저 어려워져서 위루관 시술로 영양을 공급하게 된 사연을 접할 때는 남 일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피하지 못할 미래를 앞당겨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는 대신에 지금 내 상태와 형편에서 여전히 가능한 것들을 즐겁게 누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보고 싶다.
파스타를 무척 좋아하는데 식당에서 파는 건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조리해서 내겐 면이 너무 뻣뻣하기에, 맘에 드는 소스와 면을 사다가 엄마의 손맛으로 만들어 먹는다. 국수 형태로 된 건 나와 도와주는 사람 모두 지치는 일이어서 수저로 편히 떠먹을 수 있는 마카로니로 대체하고, 식감이 최대한 부드러워지도록 오래 삶아낸다.
로제나 까르보나라처럼 부드러운 크림이 들어간 소스를 고른 후에 양송이와 토마토, 고기나 해산물은 씹기에 번거로워 생략하고, 다진 마늘과 우유, 파마산 치즈를 충분히 넣어서 볶다가 마지막에 고춧가루와 바질을 솔솔 뿌려준다. 아픈 아들을 잘 먹이려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솜씨가 부엌에서 요리하시는 모습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식탁에 앉아 그 정성스러운 과정을 눈길과 귓가로 담으면서, 어린 시절에 읽었던 계몽사 디즈니 동화 전집 중에 <단추로 끓인 수프>라는 작품을 떠올린다. 조카 데이지가 한껏 아쉬운 표정으로 구두쇠 스크루지 아저씨에게 이것만 넣으면 더 맛있다고 계속 꼬셔서 수프에 각종 식재료를 더하고 양이 너무 많아져 동네 주민들과 넉넉하게 나누는 정겨운 내용이었다.
요리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며 취향에 맞는 음식을 발견할 때마다 어떻게 응용하고 대체하면, 내가 처한 위중한 상태에도 무리 없이 맛보고 즐길 수 있을지 상상의 날개를 펴보는 것만으로 허전했던 마음이 포만감으로 든든해진다. 그림의 떡 같은 수많은 음식과 음료들을 구경하면 절로 한숨도 나오지만, 수동적으로 슬픔과 우울감에 빠지는 대신에 능동적인 관심으로 소소한 설렘과 낙관적인 기대를 맘껏 품어보는 일상이 내게 누구도 부럽지 않은 천진한 행복을 선물한다.
씹고 삼키며 맛보는 평범한 생활을 결국 잃게 될 테다. 다만 20대에 선고돼 절망을 안겨준 시한부 진단과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에 위급하게 실려 간 날들에 가족의 적극적인 돌봄과 헌신 가운데 한 뼘 더 낮아진 삶을 뜨거운 기도와 단정한 감사, 담대한 긍정으로 새롭게 받아들였듯, 곧 닥쳐올 큰 변화의 깊은 밤도 괜찮은 적응에 닿아서 머잖아 평안과 기쁨을 되찾을 거다.
이미 먹지 못하게 된 근육장애인 선배와 동료들에게도 눈부신 생명을 지키며 잘 지내줘서, 귀한 인생을 견디며 살아줘서 눈물 나게 고맙다고 안부 인사를 건네고 싶다. 당신들이 이 시절을 함께 버텨준 덕분에 두려움을 떨치고 떠오른 오늘을 아기자기하게 가꾸며, 당도할 미래를 한결 안심하며 맞이할 수 있다고.
[더인디고 THE INDI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