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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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타일 사이로 빨간 피가 흐르고 있다/ 삽화=김소하 작가
▲바닥에 깔린 타일 사이로 빨간 피가 흐르고 있다/ 삽화=김소하 작가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독일을 비롯한 유럽 도시를 걷다 보면 길바닥에 가로세로 10센티의 정사각형 황동판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판에는 ‘이 집에 00년도에 태어난 00이 살았다(예시)’, ‘00년에 체포되어 00년에 수용소(예시)에서 살해되었다’와 같은 독일 나치 시대에 집단 수용소나 각지에서 희생당했던 사람들의 정보와 피해 사실이 적혀있는데, 별도의 공간에 따로 전시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도나 주택 입구 바닥에 박혀 있습니다. 이 판을 독일어로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고 부릅니다.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은 동사인 Stolpern(슈톨퍼른·걸려넘어지다)과 명사 stein(슈타인·돌)이 결합해 만들어진 어휘로 ‘걸림돌’을 의미합니다. 사전적으로는 ‘걸림돌’로 해석되지만, 한국식으로는 ‘기억의 돌’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 돌은 독일의 예술가인 ‘군터 뎀니히(Gunter Demnich)’가 1992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독일 나치 시대에 희생당하고 고통받았던 이들의 후손과 이웃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희생자들이 살았던 집을 찾았습니다. 이후 1995년 쾰른에 첫 번째 슈톨퍼슈타인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2006년부터는 유럽으로 퍼져 현재에는 28개국에 10만 개 이상이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민간인에 의해 시작된 프로젝트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큽니다.

이 프로젝트의 모토는 ‘한 인간의 잊혀짐은 그의 이름을 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라는 것입니다. 독일 나치 시대에 희생된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었던 유대인, 집시, 성소수자, 장애인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것인데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슈톨퍼슈타인은 황동으로 만들어져 매연과 비바람 등에 의해 부식되고 훼손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매년 11월 9일이 되면 설치된 장소의 주변 이웃들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한다고 합니다. 1938년 11월 9일 밤 수천 개가 넘는 유대인 회당과 상점이 독일인들에 의해 약탈과 파괴를 당했고, 400여 명의 유대인이 희생당한 독일 역사상 가장 암흑 적인 수정의 밤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모두 이날을 기해 돌을 닦으며 역사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독일 시민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을 잊는 순간, 끔찍한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제수용은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자행되었습니다.

2024년 9월 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성지원 양지원), 경기 성혜원에서 불법적 단속 및 강제수용, 감금·폭행·강제 노역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음을 밝히며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발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발표와 함께 집단수용시설 피해 복구를 위한 조치를 수립하고 별도 구제신청이 없더라도 국가 차원에서 추가 피해 조사를 진행해 보상하고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세계인권선언문 선포 76주년이 되는 2024년 12월 10일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대구시립희망원 불법 단속 및 강제수용 피해자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었습니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국가가 대구시립희망원 강제수용 및 인권침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외쳤습니다. ‘피해자 명예회복과 지원정책을 마련하고, 시설수용 인권침해 재발 방지를 위한 포괄적인 탈시설 정책 마련하라’라고 요구했습니다.

시설수용의 끔찍한 역사를 겪은 사람들과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슈톨퍼슈타인이 되어 과거를 잊지 않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존재를 사회와 분리하여 수용하는 것은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라고 국가 스스로 인식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인디고 THE INDIGO]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팀장으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애 인권 이슈를 ‘더인디고’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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