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어릴 적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때로 가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종종 했었다. 크게 다쳤을 때도 그랬던 것 같고 성적이 떨어졌을 때도 그랬던 것 같고 갑자기 실명을 하게 되었을 때도 그랬지만 그냥 이따금 그러기도 했다.
전자오락 게임기에서 게임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르듯 뭔가 다시 하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 친구와 관계가 그렇게 나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정리 노트를 한 번만 더 읽었더라도 성적이 달라졌을 텐데!’
‘그 주식을 사야 했어.’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실명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내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 있다. 어쩌면 꽤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서 아무런 후회가 없거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완벽한 상태일 수는 없다. 몇몇 순간은 지금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삶이 존재할 리 없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 게임에서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더 나은 게임 결과를 위해 또다시 시작 버튼을 누른다. 틀어졌던 사이를 되돌릴 수 있지만 또 다른 실수마저 막을 수는 없다. 과거의 관계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면 쿨하게 사과부터 건네는 게 낫다.
장애 없는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시력이 있다고 해서 내 몸의 모든 부분을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다. 조금 더 많은 돈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욕심은 끝이 없다. 수조 원을 가진 재벌 총수들이 조금 더 벌려고 하다가 포토 라인에 서는 것을 보면 그 삶이 우리보다 가히 나을 것이 없다.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난 조금 더 나아짐을 꿈꿀 것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결국 끝없는 되돌리기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두드러지게 멋있는 배우들이 있다. 주연뿐 아니라 조연이나 작은 카메오를 맡아도 그의 연기는 감칠맛이 난다. 사장님 역할도 멋있지만, 악역이나 장애인 역할도 매력적으로 살려낸다. 그런 배우들은 역할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극 중 어떤 캐릭터라도 멋지게 소화해 낸다.
배우들이 극 안에서 그럴 수 있다면 나도 내 삶 안에서 그럴 수 있다. 난 시각장애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다른 역할을 꿈꾸지 않아도 내 역할을 충분히 매력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난 엄청 많은 부를 축적하지 못한 40대 가장 역할을 맡았지만, 그 또한 맛깔나게 소화할 수 있다. 이런저런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 역할을 맡았지만,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꽤 괜찮은 연기를 할 수 있다.
하루에도 셀 수없이 주어지는 선택의 순간들 앞에서 내가 내리는 후회 없이 완벽한 결정은 거의 없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참지 못했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게 내 삶이다. 세상에 완벽한 선택은 없지만 어떤 선택이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좋은 결과를 위해 매 순간 부단히 고민해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과를 맛깔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많은 것을 가져도 힘들 수 있고 가진 것 없는 장애인으로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 어딘가의 과거로 돌아가려고 후회를 반복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미래가 기다리는 내일을 설레며 살 수도 있다.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도 없지만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주어진 조건으로 가장 멋지게 살아낼 내일을 고민하는 게 낫다. 대배우들이 존경받는 것은 좋은 배역을 맡아서가 아니다. 내 삶의 모양이 최고는 아닐 수 있지만 누구의 삶이라도 박수받을 만큼 멋질 수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