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입장이 바뀐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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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help, 돕다)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픽사베이
▲헬프(help, 돕다)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픽사베이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맹학교는 건물도 시스템도 시각장애인에게 최대한 편의가 제공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부분의 장소에는 점자 안내판이 붙어있고 점자블록과 핸드레일도 없는 곳이 없다. 로비에도 복도에도 발에 걸릴만한 짐은 절대로 놓아두지 않지만, 혹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장애물이 생긴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위험을 알려주는 인력이 배치된다.

교장 선생님께서 특별히 애맹정신을 강조하는 우리 학교라서 더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인사를 할 때에도 “안녕하세요? ***입니다.”라고 이름을 말하고 외부 수업을 나갈 때엔 1:1로 안내인을 붙여줄 정도이니 학교 활동에서만큼은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니만큼 때때로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라 학생들이 느끼기엔 조금 덜 친절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분 너무 불친절한 것 같지 않아?”
“다 보이면서 안내도 안 해주시고…”
“이름도 잘 말 안 해주시고…”


불만이 터진 학생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만약 우리가 사는 이곳이 어느 소설의 배경처럼 모두 깜깜해진다면 우리는 좋을까?”
“그거 좋네요. 그럼, 우리가 더 잘 다니고 점자도 더 잘 읽고 입장이 완전히 바뀌겠네요.”

아이들은 상상만 해도 신난 것 같았다. 모든 세상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잘 다니고 잘 읽고 잘 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니 여러 가지로 재미난 상상이 머릿속을 채우는 것 같았다.

“서점에 가도 점자책만 있겠네요.”
“지도도 모두 음성이나 점자로 되어 있겠네요.”

상상 속 이야기이긴 했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얘들아! 근데 그렇게 되면 움직일 때도 책을 읽을 때도 너희가 도와줘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그럼요. 얼마든지요.”라고 대답을 내뱉던 한 녀석이 조금 더 생각을 곰곰이 하더니 자신감이 떨어지는 목소리로 “매번 그렇게 도와줘야 하겠지요?”라고 말을 이었다.

“그럼 점자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우리가 많이 도와줘야겠지.”
“길을 다닐 때도 우리가 안내를 해줘야 하고…”
“아…!”

이런저런 상황을 깊이 생각하던 아이들은 조금 자신이 없어지는 듯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세상에서 나조차도 내가 받던 도움을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된 이들에게 꾸준하게 적극적으로 베풀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식당에 가면 메뉴판을 소리 내 읽어주고 반찬의 위치를 설명하고 음식을 덜어주고 하는 것은 매번 받는 도움이었지만 그것을 내가 매번 누군가에게 해 줄 수 있을지는 흔쾌히 대답하기 힘들었다. 종이로 된 안내문서가 나오면 누군가는 나에게 소리 내 읽어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런 모든 상황에서 나도 그 일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면 조금 귀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다닐 때는 매번 내 팔을 붙잡고 따라오는 이가 있고 낯선 곳에 가게 되면 화장실을 안내하고 일이 끝나기 전까지 기다려줘야 하겠지만 막상 내가 그런 일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당연하게 해낼지는 자신이 없었다.

학교 안에서 내가 받는 도움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지만, 상황이 바뀐다면 나의 모습이 그런 자연스러운 도움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에이! 그냥 지금이 나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녀석이 생길 만큼 도움받고 있던 우리는 도움 줄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조금 덜 친절해서 불평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에게 마저 미안한 마음이 드는 듯했다.

시력 좋은 사람은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고 어쩌면 나조차도 당연히 여기고 있었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감사를 잊고 있었고, 또 다른 상황에서 나 또한 베풀고 나누는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는 일이나 나의 시력이 번쩍하고 돌아오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꼭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내가 받은 만큼 난 값없이 베풀 수 있어야만 한다.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받았다면 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주어야 한다.

오늘 하루에도 난 수많은 도움 속에서 살았다. 어떤 이는 나에게 팔을 내어주었고 또 어떤 이는 나를 위험에서 건져내었다. 정보를 나눠준 이도 있고 마음을 나눠준 이도 있다. 감사한 장면이지만 익숙해진 나머지 조금은 당연히 여기며 지나왔다.

난 시각에 장애가 있는 소수 약자이지만 때때로 상황에 따라 다른 이들보다 나은 입장이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고 믿는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상황에서 난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였는지를 생각하니 많이 부끄럽고 민망하다.

우리의 입장과 처지는 변하고 또 변한다. 배려와 도움을 받을 때는 감사해야 하고 나눌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이야기이지만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장애인의 날! 여러 곳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한다. 다들 잘하고 있겠지만 내 권리를 주장하고 적절한 배려를 말한 만큼 나는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도 한 번쯤 해 봤으면 좋겠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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