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최병호 집필위원] 나는 신록이 푸르른 계절 오월에 태어났다. 여느 아기처럼 우렁차게 울었고 엄마 품에서 포만감을 느끼며 쌔근쌔근 잠들었다. 다시 깨어나 아빠에게 방긋방긋 웃었다. 할아버지는 명필로 밝고 너그럽게 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할머니는 작은 머리에 손을 얹고 감사기도를 올려주셨다.
아기는 겉모습과 다르게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으며 아장아장 걸음마 하는 전반적인 발달이 더디고 약했다. 5살에 서울성모병원에서 듀센형 근육병 진단을 받았을 때 아버지만 참담한 결과를 듣고 일 년 넘도록 홀로 가슴앓이하며 보내셨다고 한다. 아들 다리 힘을 기른다며 화장대에서 뛰어내리게 해서 팔에 금 갔는데 엄마는 뒤늦게 사실을 알고 한스럽게 우셨다.
가족이 손주와 자식, 오빠가 가진 난치병과 장애 선고를 처음 들었을 적에 받은 온몸 떨리는 충격과 복받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지 못할 내 악조건이 모두를 괴롭게 옥죄는 것처럼 느껴져서 속상하고 미안하다. 동시에 취약한 나를 끝까지 놓지 않고 보듬고 살리는 한결같은 사랑과 용서를 믿는다. 친밀한 포옹과 지지를 담은 든든한 손길에 감사하고 감동한다.
엄마에게 업혀서 학교에서 공부했고 병원을 꾸준히 다니며 삼시세끼를 먹는다. 엠부백(수동식 인공호흡기)에 숨을 늘리고 아빠 가슴에 안긴 채 화장실에 간다. 통증이 심한 부위를 동생 두 손에 맡겨서 안마받고, 조카에게 상처를 지혈 받는다. 반려견이 간지러운 핥음으로 애교를 부린다.
넘치도록 받았어도 나는 여전히 철들지 않은 아이처럼 불평과 짜증을 부리곤 한다. 편하게 기대는 끈끈한 신뢰가 있는 만큼 내가 처한 고통과 불편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 데가 마땅치 않아 전가하기도 한다. 그런 이기적 이중성을 직면하거나 새삼 떠오를 때마다 그들을 향한 죄책감과 마주한 내 무력감에 한동안 집중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빠지곤 한다.
그래서 평소에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가족의 육체적인 보살핌과 정신적인 지지를 받을 때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감사하려고 애쓴다. 마음속으론 자주 느끼는데 아직은 겉으로 표현하기 쑥스러워서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아가 그들이 내게 불가피하게 주는 상처와 부담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고 용서의 지우개로 지워서 사랑의 일원이 되고자 힘쓴다.
부모님이 합심하여 병약한 아들을 매만지는 날이 있다. 이발과 목욕이다. 휠체어에 앉아서 아버지의 세심한 가위질로 덥수룩한 머리칼이 단정하게 깎인다. 맞춰 짠 전용 깔판에 몸을 눕히고 어머니의 야무진 비누칠과 온수 물줄기로 말끔하게 씻긴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식탁에 앉혀서 스킨로션을 바르고 헤어젤로 스타일을 살린다.
두 분이 그런 나를 한마음으로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살가운 손길로 소중하게 어루만져 주시면,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남긴 피천득 수필가의 문장이 내게 그대로 재현된 듯 느껴져서 말할 수 없이 벅차오른다. 우리 가족에게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에 태어나 싱그런 연둣빛 미소를 띠며 갈등을 중재하는 평화주의자가 되고 싶다.
그 신뢰와 사랑이 있기에 나는 몸의 고통을 고백하며 치유를 돌려받고, 삶의 장애를 기록하며 환대로 더불어 숨 쉰다. 감각과 사유, 영성을 기쁨으로 나누는 내게 공감과 연민, 사랑을 기꺼이 내주는 이들이 계셔서 낙인과 혐오의 깊은 상처가 푸르게 낫는다. 짙은 슬픔을 촉촉한 감성으로 껴안고 쓰디쓴 절망을 귀중한 거름으로 거두는 모든 존재가 희망의 손을 붙든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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