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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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fear)/사진=픽사베이
▲두려움(fear)/사진=픽사베이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이런저런 자리에서 여러 번 말했지만,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매우 힘들거나 아주 슬프거나 하지 않다. 난 잘 웃는 편이고 즐거운 편이고 행복한 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잘 믿으려고 하지 않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주변의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그렇다.

시력 좋은 어떤 사람에게 “내년 어느 날 당신은 실명할 것입니다”라고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좌절하겠지만, 내가 조언할 수 있다면 슬퍼할 시간에 차분하게 점자나 지팡이 보행을 배우라고 말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볼 수 있는 상태보다 불편한 것이 사실이기에 실명이 반가울 리 없겠지만 당장 닥치지 않은 일 때문에 현재의 나를 슬픔에 가둘 필요는 없다. 그에게 실명을 예고한 사람의 말이 틀릴 수도 있고, 예견대로 정말 실명을 한다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슬퍼하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만큼 눈이 보이지 않는 삶이 앞을 잘 보는 이의 삶에 비해 매 순간 불행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 이상의 두려움과 슬픔으로 채워간다. 1년 뒤에 내가 실명을 분명 마주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남은 365일마저 그 사건에 대한 두려움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 차분하게 준비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고 그 연유로 슬픔이 찾아온다면 그 또한 짧을수록 좋다.

언젠가 몇 명의 근육장애인들의 농담을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대부분이 진행성 질환인 그들의 모임에서는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누구의 장례를 치러줄 것인가도 농담의 소재로 사용된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뭐라고 대꾸하기도 힘들 만큼 당황스러웠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죽음은 어차피 예정된 것인데 닥쳐올 죽음 때문에 얼마 남았는지도 잘 모르는 생을 모두 그에 대한 걱정으로 채울 필요는 없었다. 남은 생은 즐겁고 신나게 채우고 죽는 것은 실제로 죽음에 가까워진 그날에 생각해도 괜찮은 일이다. 준비할 것들이야 조금씩 미리 해둬야겠지만 감정마저 늘 죽음에 휩싸일 필요는 없었다.

제자 녀석이 다음 학기에 큰 수술을 예정하고 있다면서 울먹거리며 들어왔다. 이미 다른 선생님들에게 걱정과 위로를 받고 감정이 많이 복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 진짜 죽으면 어떡하죠?”

내게도 또 다른 따뜻한 위로를 기대하고 있었겠지만 내 대답은 “안 죽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진짜 안 죽으면 그렇게 울다가 민망해서 학교 어떻게 나오려고 그러냐?”였다.

아픈 학생이 걱정되는 것이야 교사 된 위치에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마저 그 녀석의 슬픔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걱정을 건넨 선생님들의 마음은 그것대로 소중한 것이었겠지만 난 조금 다른 방법의 위로를 주고 싶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라고 당황하며 입술을 쭈뼛대는 녀석에게 “죽는 거 그렇게 쉬운 것 아냐. 너 안 죽는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문제나 풀자!”하고 말하는 교사가 그가 보기엔 참으로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녀석의 고민을 쉴 새 없이 가벼운 농담처럼 치부해 버리는 나 때문에 어느 순간 그도 웃고 있었다.

제자의 큰 수술은 나 또한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몇 달이나 남은 병원 수술 때문에 그 모든 시간을 그가 걱정과 두려움으로 채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죽음이 삶에 비해서 슬프기만 한 것인가라는 어려운 철학적 고민은 뒤로 놓더라도 일어날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으로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을 우울하게 채우는 것은 선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들의 슬픔과 걱정이 어떤 상태에서도 가벼웠으면 좋겠다. 연인과의 이별을 앞둔 이도, 실명을 예고 받은 환자도, 죽음을 기다리는 누군가도 그 일이 실제로 닥쳐오기 전까지는 차분한 준비와 가벼운 걱정 정도로 시간을 채웠으면 좋겠다. 슬픈 예감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신나게 살고 혹시 그 예감이 눈앞에 오게 된다면 최소한의 짧은 슬픔으로 지나보냈으면 좋겠다.

세상에 얼마나 견디기 힘든 아픔과 슬픔이 존재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실명도 죽음도 웃음과 농담으로 여기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굳이 미리부터 겁먹고 두려워하고 슬퍼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난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웃으면서 잘 살고 있다. 하루하루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는 근육장애인들도 맛있는 것 먹어가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수술을 앞둔 나의 제자 녀석도 매 순간 걱정보다는 기쁨으로 시간을 채웠으면 좋겠다.

모든 이들의 걱정이 각자에게 지금보다는 가볍게 여겨지기를 바란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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