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호의 마음가짐] 엑스레이에 새겨진 아픈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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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노란 꽃 한 무리ⓒunsplash
▲흐릿한 노란 꽃 한 무리ⓒunsplash
최병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최병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최병호 집필위원] 사십이 넘는 일생에 병원 진료와 입원을 숱하게 거치면서 살았다. 순환하는 사계절과 진행되는 병세의 무상함과 무심함을 작고 연약한 몸으로 힘겹게 감당한다. 거기에다가 마음속까지 절망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지면 삶의 비애에 젖어 맘도 먹먹하다. 그럴 때면 술로 달랠 수 없는 체질을 탓하면서 한낮에 내린 커피 한 잔으로 지친 마음을 살살 어루만질 수밖에 없다.

듀센 근육병이란 진단명은 환자가 실감하기 어려운 추상적 지식일 뿐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프게 견디면서 통과해 온 구체적 체험이 중요하다. 그 살아 숨 쉬는 가치를 생명의 중심에 놓아야만 의학적 검사의 건조한 결과가 촉촉한 문학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엑스레이만 찍어도 전신을 지탱하는 크고 작은 뼈들이 미처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 채 삐쩍 마른 잔가지처럼 드러난다.

휠체어 타기 전까지 거듭해서 우습도록 휘청이고 아찔하게 넘어지던 날들이 오래전 기억에서 소환되어 악몽에 쫓기듯 괴롭게 되풀이된다. 여린 무릎 살에 피딱지가 생겼다가 떨어지길 반복하던 쓰린 통증과, 뛰어내리다 고꾸라져서 가느다란 오른팔에 금이 선명히 갔던 그 부은 좌절이 생생하다. 울음을 꾹 삼키고 웃음으로 가리며 가까스로 버텨낸 무기력한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다쳐서 돌아온 아들을 향해 엄마는 속상한 표정을 짓거나 애타는 반응을 보인 적이 드물었다. 감정적 소진에 빠지는 대신에 소독과 지혈이 우선이다. 신속하게 조치하고 약을 바른 후에 잘 마르면 반창고를 붙여주셨다. 엄마의 사랑은 살가운 표현보다 살뜰한 행동에 가까워서 어린 맘에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날 깨끗이 씻기고, 입히며, 먹여서 보살피고, 식지 않는 아랫목처럼 포근히 안고, 업으며, 만져서 키웠기에 사소한 원망은 진눈깨비 녹아내리듯 사르르 지워져 버렸다.

보이고 만져지는 장애를 넘어서 가려지고 숨겨진 장기까지 병마가 침투했다. 진료실에서 휠체어에 앉아 흉부 엑스레이를 얼핏 올려봐도 양쪽 폐 이곳저곳에 뿌연 스모그를 머금은 불길한 영상이 관찰된다. 흔한 감기 한 번 걸려도 밤새 앓던 불면의 통증이 눈에 띄는 흔적을 남겨놓았다니 참 가혹하다. 바이러스와 벼랑 끝 싸움처럼 피 터지는 일진일퇴를 벌이면서, 멎지 않는 사나운 기침과 역하게 쏟고 마는 가래를 주위에 고스란히 보일 때마다 수치스러웠다.

그럼에도 가족 구성원 누구도 병약한 손자와 아들, 오빠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친지와 지인, 친구에게 소개했고, 인간답게 대우받으면서 그들 품에서 사랑스럽게 자랐다. 관심 어린 눈길과 정성 담긴 손길, 수고 들인 발품과 헌신 다한 마음을 모아서 듬뿍 받았다. 그 돌봄에 기대어 인생에 안정되게 뿌리내려서, 성숙한 긍정과 겸손한 감사를 표현하면서 온정으로 곁을 내주는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났다.

엑스레이 필름에 비치는 앙상한 형상을 이제 더 이상 멸망이 예정된 고통과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에 그 어둠을 역전시켜서 창조를 그리는 자유와 사랑의 빛으로 삼자고 다짐한다.

맑은 정신과 밝은 영혼으로 전시 중인 예술 작품을 대하듯 감상하니까 흑백이 반전된 조형물과 수채화가 정체를 드러낸다. 겁먹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내 고유한 몸을 두 눈에 담으니 마음 깊이 자부심이 차오른다. 강력한 힘을 부릴 순 없어도 섬세한 뜻을 새길 수 있는 우리가 된다면 귀한 인연들과 온전히 살피고 온건히 살리는 평화로운 공존에 닿을 테다.

[더인디고 THE INDIGO]

페이스북에 질병과 장애를 겪는 일상과 사유를 나누는 근육장애인입니다.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공존의 영토를 넓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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