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금순 = 더인디고 집필위원] 묵혀두었던 5월 이야기다.
올해 어머님 생신에는 지인 소개로 식당에 납품된다는 양념돼지갈비 10kg을 샀다. 때마다 내가 했던 등갈비나, LA갈비는 때론 좀 달거나 짜기도 했지만, 맛있게 드시는 엄니 모습이 보기 좋아서 자꾸 하곤 했다. 막 해도 손맛이 나는 음식 장인이 아닌지라, 과일이랑 채소도 갈아서 남들 같은 양념갈비 흉내를 낸다.
나박김치는 담갔다. 배랑 알배기 배추 1포기, 무와 당근, 오이와 생강을 사고, 지인에게서 얻어 쟁여뒀던 미나리를 십분 활용했다. 알배기 배추와 무를 나박나박 썰어 소금에 절궜다. 오이와 당근, 배도 나박나박 썰고, 미나리와 쪽파는 길이를 맞춰 썰었다. 물김치 재료란 재료를 간이 빨리 잘 배도록 납작하게 썰어서 이름이 나박김친가 보다.
서서히 맛을 낼 수 없다면, 한껏 납작한 저자세로 승부를 걸 일이다. 합이 안 맞는다는 오이와 당근도 식감과 색감의 조화를 위해 함께 썰어 넣었다. 나의 요리는 그날 기분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재료가 바뀌고, 맛도 이랬다저랬다 한다. 25년 차 주부이지만, 엄마 손맛을 못 따라간다. 그래서 늘 엄마 음식이 그립다.
밀가루 대신 찹쌀가루로 풀을 쑤었다. 믹서기에 사과와 배, 생강과 마늘, 양파와 커피 스푼 한 숟갈 분량의 새우 육젓을 넣는 둥 마는 둥 넣고, 찬밥 한 숟가락과 물을 넣어 곱게 간다. 홍고추 몇 개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거칠게 한 번 더 갈아준다.
수년 전에 시어머님이 만들어준 베보자기를 꺼냈다가 그냥 철재 체에 걸렀다. 소금과 뉴슈가로 간하고, 조금 짭짤하다 싶은 대로 상온에 두었다가 다음날 미나리를 넣고 냉장 보관했다.
농수산물시장에 활동지원사를 보내서 싱싱한 선물용 과일을 샀다. 잇몸으로도 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달콤한 제철 과일 망고를 샀다. 덜 단 과일에게 배신감을 맛볼 만큼 요즘 과일들은 다디달다. 애플포도와 용과도 샀다. 사과나 토마토, 키위 대신 평소 많이 먹지 않았던 과일을 샀다.
오징어채를 잘게 찢고, 고추장에 섞은 다진 마늘과 몇 가지 양념이 끓어오를 때 불을 끄고, 오징어채에 옷 입혀 참기름과 통깨로 마무리하는 마른반찬 하나도 만들었다. 이왕 빨간 맛인 오징어채볶음엔 송송 썬 청양고추도 박혀있다.
시조카가 낳은 일곱 살, 다섯 살 손녀를 위해 티라미수 케이크도 사고, 우유와 요거트로 홈메이드 플레인요거트도 만들었다.
춘삼월에 태어난 세 번째 손녀에게 줄 내복을 사고, 어머니 침대에 깔아 놓을 패드형 기저귀도 두 묶음 챙겼다. 크기와 용량이 다를 뿐, 백일 손녀에게도, 구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님에게도, 마음대로 화장실에 못 가는 내게도 가끔 필요한 게 기저귀다. 생각해 보면 해준 것도 없는데, 내게 할머니 이름표를 붙여줬으니 두 간호사 조카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남편의 엄마, 누나나 여동생의 배우자, 그들의 자녀 그리고 손자까지 옛날부터 남들도 다 불러왔던 호칭을 나도 따라 부르면서도 시동생을 ‘서방님’이라 부를 때, 손아래시누를 ‘아가씨’라 부를 때, 이 외에 적절한 호칭이 딱히 없어서 문득 어색하고 낯간지러울 때가 있다.
나는 손위시누와 손아래시누의 배우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애가 없는데도 ‘고모부’라 부르고 있는데, 사실 이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 같다. 그 ‘고모부’들에게 나는 ‘처남댁’으로 불리니까 남편 하나의 역할이 아주 중대한 것 같다.
시어머님 생신을 앞둔 부산함을 한껏 떨었지만, 어머님이 드실만한 음식은 겨우 돼지갈비와 망고뿐이었다. 바리바리 뭘 싸 가더라도 어머니 앞에 밥그릇, 생선 접시 하나 놓아드릴 수 없어서 늘 빈손 같은 며느리는 등을 긁어드리는 대신 안테나식 등긁개를 사 드렸다.
집을 나설 땐 괴나리봇짐 정도만 꾸려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하룻밤이든 그 이상이든 어딘가로 떠날 땐 남들처럼 갈아입을 옷과 여행용 칫솔 정도만 챙긴다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내겐 기대는 가죽가방, 앉아 있을 때 필요한 굄돌 같은 가죽 성경책, 누워 잘 때 옆구리에 끼고 자는 쿠션, 소변통 등이 꼭 필요하다. 떡하니 한자리를 차지하는 전동휠체어에 배낭 두 개 정도의 짐을 매달아야 집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저런 불편함과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명절이거나 시어머님 생신이면 힘써 모이고 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럴 수 있을 때까진 그럴 것이다. 언제부턴가 맏딸, 맏며느리의 부담감과 부채감을 내려놓고 있다. 누구라서 무얼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가는 대로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
“언제 또 올 거냐?”
“어머니, 죄송해요. 금방 또 뵈러 올게요.”
비웠다가 채워진 짐을 챙겨 휠체어로 나오다가 촉촉해진 엄니 눈에 내 눈도 붉게 포갠다.
금방이 두 달이 되었지만, 올 추석쯤에나 가뵙지 않을까 싶다. 이젠 전화해도 못 받으시고, 전화하는 것도 잊어버리셔서 엄니 목소리 듣기가 쉽지 않다. 허공 어딘가를 헤매던 엄니 눈빛은 낯설어도 모성을 간직한 엄니 입술은 “너희만 잘살면 된다. 고맙다.”라고 하신다.
십 년 전쯤에 난 엄마에게 아주 고약한 말을 했었다.
“엄마! 그냥 사위가 없다고 생각해. 딸 도와주는 남자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서운함은 사라지고 차라리 고마울 거 아냐.”
“어떻게 있는 사위를 없다고 생각하냐?” 엄마는 울먹였었다.
그리고 시어머니에게도 “어머니! 며느리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아들 도와주는 여자가 하나 곁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서운함보다는 든든한 마음이 드실 수 있잖아요.”라고 말씀드렸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어느 시점에 틀어진 관계 속에서 세상 사위랑 며느리에 비교하며 힘들어하는 두 엄마를 보다가 내가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서른 중반이었을 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에게 써 부쳤던 편지가 생각난다. 열두 살이었던 내게 모진 말씀을 하셨던 아버지를 두고두고 미워하며 살았는데, 이젠 용서해 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먹먹하고 슬퍼서 한동안 왈칵 눈물을 쏟곤 했지만, 아버지에게 보냈던 그 편지 한 통이 큰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를 용서했는데,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은 내 것이었다.
관계는 인정하되, 명분에 옥죄이지 않기 위해 그렇게 독하고, 미운 역할을 나는 자처했었다. 그냥 했거나, 단순하게 했던 것들이 삶이 되었다. 숨이 턱에 차면 내려놓고, 숨통이 트이는 것들을 그냥 한다.
Just do it!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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