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동대학살 102주기 추모 칼럼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늦은 밤 TV를 켜자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화면에 펼쳐졌다. 추도식에 참여한 한 일본 시민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시 사과할 것은 제대로 사과해야 하고, 이를 일본인과 한국인 모두에게 확실히 전달해야 합니다.”
은폐하고 피하기 바쁜 일본 정부와 달리, 자신의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진심이 가슴에 닿았다. 눈물이 났다.
1923년 9월 1일,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 일본 관동 지역을 덮친 대지진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자연재해보다 참혹한 것은 그 직후 벌어진 인간의 폭력이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퍼진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공포를 키웠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일으켰다, 방화와 약탈을 주도했다”는 소문은 군과 경찰, 민간 자경단의 칼날이 무고한 조선인들에게 향하도록 만드는 명분이 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혹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살해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관동대학살’이라 부른다.
이 사건은 우발적 폭동이 아니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집단 살해였으며,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의 전형으로 본다.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려는 폭력, 사회에 뿌리내린 구조적 혐오가 폭발한 순간이다. 당시 조선인은 ‘적대적 타자’로 규정되었고, 그 결과 법의 보호는커녕 집단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그날의 참극을 가능하게 한 힘은 ‘혐오와 유언비어’였다. 근거 없는 소문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불안을 먹고 자란 공포는 폭력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말에는 증거가 없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 차별과 편견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에 쉽게 믿어졌다. 혐오는 언제나 사실보다 빨리 퍼지고, 불신은 진실보다 깊게 파고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역사를 단지 102년 전의 비극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혐오와 유언비어는 다른 얼굴로 살아 있다. 이주민에 대한 왜곡된 소문,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근거 없는 낙인,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 발언이 그 예다. 지하철 시위에 나선 장애인들을 향해 “나라 망신이다”, “세금도 안 내면서 혜택만 받는다”는 말들이 쏟아졌다. 이는 단순한 무례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폭력의 서막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제도 속 혐오가 드러난 사례가 있었다. 정부가 추진한 ‘나라키움 대학생주택’에서는 정신질환자를 입주 제한 사유로 명시했다. 청년의 정신질환 경험이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공공주택이 오히려 정신질환자를 배제하고 잠재적 위험으로 낙인찍는 장치가 된다면, 이는 국가가 차별을 제도화하는 셈이다. 다행히 장애인 단체들의 문제 제기와 인권위 진정을 통해 해당 조항은 삭제되었지만, 이 사건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연대 발언에 나선 유인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팀장은 “이번 조항은 단순한 행정 규정이 아니라, 정신질환자를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장치”라며, 헌법과 국내외 인권규범을 모두 저촉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정신질환자 입주 제한 조항 삭제와 주거권 보장 대책 마련, 공공임대주택·기숙사형 주택에서의 차별 중단을 요구하며 진정을 제출했다. 이는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관동대학살과 오늘날 사례가 말해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혐오가 사회에 뿌리내리면, 작은 불씨 같은 유언비어와 편견이 집단 살해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불길로 번진다. 누군가를 ‘불필요한 존재’로 낙인찍는 순간, 사회는 그를 향한 폭력을 묵인할 준비를 한다. 혐오 발언과 차별적 규정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럼에도 희망은 존재한다. 일본 사회 안에서도 매년 희생자를 추모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사건을 알리는 시민과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노력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폭력과 혐오의 재현을 막는 실천이다. 우리 역시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현재의 혐오와 맞서야 한다.
관동대학살 102주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묻는다. 혐오와 유언비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죽어간 이들에게 바치는 진정한 추모는,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오늘의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것이다.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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