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불고기 덩이를 독식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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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술 등을 통해 시각장애인이 휴대폰으로 사물의 색깔이나 크기를 구분하는 이미지 /챗gpt
▲AI 기술 등을 통해 시각장애인이 휴대폰으로 사물의 색깔이나 크기를 구분하는 이미지 /챗gpt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대학 시절에 들르던 학교 앞 호프집은 메뉴의 가격이 많이도 저렴했다. 소주도 맥주도 안주까지도 착한 가격을 붙인 그곳에 우리는 단골이라 불릴 만큼 자주 갔다. 저렴하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주를 푸짐하게 시켜놓고 소주잔을 기울일 처지는 못 되었기 때문에 식탁의 크기나 모인 인원수와는 관계없이 안주는 보통 하나 정도만 시켜놓고 둘러앉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다 돈이 없어서 만들어진 말이었겠다 싶지만, 선배들은 안주발을 세우면 애주가가 아니라느니 마신 잔의 숫자가 안주를 집는 수보다 많아야 남자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때 우리가 그런 말들이 가진 실체적 진실을 진짜로 몰랐는지 아니면 돈을 내야 하는 선배들보다 특별히 경제적 상황이 낫지 못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치킨이라고 쓰인 메뉴를 주문해도 소시지라고 적힌 메뉴를 주문해도 왜 채소만 잔뜩 나오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접시에 담긴 결과물의 구성 비율이 그랬으므로 소주 한 잔을 들이켠 이후에 우리의 젓가락이 향하는 곳은 고기 아닌 채소를 향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 있는 행동이었다. 고기나 소시지를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규칙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채소를 몇 번 정도는 먹은 후에 그것도 크지 않은 조각부터 조심스럽게 가져와야 한다는 약속 정도를 우리는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난 그런 규칙을 남들만큼 섬세하게 지킬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불고기를 시킨 날도 이상하게 나의 젓가락엔 하나밖에 없는 큰 덩어리가 집혀 왔고, 치킨도 소시지도 의도치 않게 가장 큰 조각이 내 젓가락에 걸려서 내 입을 향했다. 친한 친구들은 “너 보이지?”하며 웃음 섞인 원망을 내뱉곤 했다. 그렇다고 내게 갑자기 고기와 채소를 구분해서 눈치껏 채소부터 그리고 작은 조각의 고기부터 집어 갈 재주가 생겨날 리는 없었다. 다소 미안한 맘이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안주 없이 강술만 먹는 것을 택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으므로 졸업할 때까지 난 종종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아 가며 의도치 않게 큰 고깃덩이를 눈치 없이 집어 가는 만행을 저지르곤 했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웃으면서 그때 이야기를 나누곤 하지만 그땐 내게도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는 배부르다며 시켜놓은 안주 대신 뻥튀기만 먹기도 했고 작은 접시에 덜어준 안주를 아주 조금씩 아껴 먹으며 나름 모두가 지키는 규칙에 동참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엔가 그런 눈물겨운 노력의 술자리가 끝날 때쯤 누군가 “아이고 치킨이 다 남았네!” 하는 소리에 말 못 한 억울함이 사무치기도 했다. 눈치를 봐야 할 곳에서는 큰 덩어리의 안주를 집어 먹고 정작 안주가 넉넉한 날엔 눈치 좀 봐야 한다는 생각에 쓸데없이 조심하고 있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새 휴대전화를 구매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전화기가 오래되기도 했지만 ‘라이다 센서’라는 기술이 궁금하기도 했다. 사전 예약 날 발 빠르게 주문한 전화기는 누구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있었다.

“1.5m 앞에 사람이 있습니다.”
“0.5m 앞에 여닫이문이 있습니다.”
“코카콜라 300mm 롯데칠성 그리고 파스타와 치킨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습니다.“

신기하게 감탄하며 카메라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가던 중 음식이 담긴 접시를 묘사해 주는 장면에서 대학 시절 눈치 없이 큰 불고기 덩이를 집어 가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난 친구들에게 “현재 불고기는 얼마만큼 있니? 작은 덩이를 집으려면 어느 방향으로 젓가락을 가져가야 하니?”라고 물을 수 없었지만 지금 가진 센서의 기술이 있었다면 그런 도움을 받지 않고도 적당히 다른 이들과 규칙에 맞추어가며 자리를 즐길 수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가 적당한 크기의 고기를 집을 때 나도 비로소 그 크기와 비슷한 고기를 먹고 또 다른 친구가 잔을 들 때 눈치껏 함께 분위기를 맞출 수도 있었다. 난 눈치가 없었다기보다는 제공된 정보의 크기가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너무도 적었다. 내게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세밀한 주변 정보가 제공되었다면 난 남들보다 더 조심할 필요도 없었고 눈치 없이 큰 고기를 집어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게 충분한 정보가 공유되는 것은 내게도 좋은 일임이 분명하지만, 큰 고깃덩이를 독식하는 한 구성원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AI가 발달하면서 휴대전화는 색을 알려주고 계기판 온도나 간판의 글씨를 읽어주기도 하고 책의 내용을 줄줄 읽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함께한 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거나 아무렇지 않은 듯 궁금함을 참았던 장면이 늘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기 덕분에 많은 부분 해결되고 있다. 기술은 눈이 불편한 이들의 장애를 덜어주고 그것은 함께 하는 이들의 부담마저 덜어내므로 우리가 모두 좀 더 편안해지게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의 기술이 아직은 접시 위에 정확히 치킨 몇 조각과 어느 정도의 채소가 있는지 세세히 알려줄 정도는 아니지만 머지않아 그리될 수만 있다면 많은 자리에서 난 시력은 없지만 눈치는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시각장애 있는 친구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많은 시간 큰 고기를 빼앗겼던 나의 오랜 친구들도 이제 더 이상 술자리마다 나의 안주 시중을 들지 않을 수 있다.

내 사무실의 시계가 몇 달째 멈춰 있었던 것도 내가 자주 가던 카페의 벽이 하얀색이 아니었던 것도 요즘 나온 음료수병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쓰여있다는 것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기술의 발달이 나의 편리함으로 그리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이들에게 행복함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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