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정치에 내재된 혐오 감수성과 편견을 본다
[더인디고 = 이정훈 에큐메니안 편집장]
1. 박민영 대변인 사건, 단순 ‘실언’인가

국민의힘 미디어 대변인 박민영이 2025년 11월 12일 극우 유튜브 채널 ‘감동란TV’에서 한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장애인을 너무 많이 할당해서 문제”, “김예지 같은 사람은 눈 불편한 것 말고는 기득권”, “약자성을 무기로 삼는다.” 장애인 비례대표 제도를 ‘과도한 특혜’로, 시각장애인 여성 정치인을 ‘눈만 불편한 기득권’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말실수가 아니라, 장애인의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의심하고 도덕적으로 폄하하는 수사에 가깝다.
논란이 커지자 박민영은 곧장 진정성 있는 사과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장애인 할당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과도한 할당을 지적한 것”, “무지성 혐오 몰이”라는 말을 앞세웠다. 비판 여론 자체를 ‘정치적 올바름(PC)에 과잉 반응하는 진영 정치’로 돌려세우려 했던 것이다. 결국 11월 17일 그는 당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장동혁 대표는 이를 반려하고 “엄중 경고”만을 남겼다. ‘당을 향한 귀중한 쓴소리’, ‘조금 지나친 표현’ 정도로 축소하며 실질적 책임은 가볍게 봉합한 셈이다.
한편 김예지 의원은 박민영을 상대로 명예훼손 및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고, 국가인권위원회에는 박민영 발언을 인권침해·차별행위로 조사해 달라는 진정이 연이어 접수되었다. 장애인·여성·인권 단체들은 “장애인 정치 참여를 부정하는 인권침해”와 “여성 장애인에 대한 이중적 혐오”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집권 여당 지도부의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 내의 작은 문제를 너무 키우지 말자.”
중요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 사안을 과연 “정치인의 개인적 일탈”로 취급해도 되는가, 아니면 한국 정치와 사회에 이미 깊게 뿌리내린 장애인 혐오 정치의 구조적 징후로 읽어야 하는가. 나는 뿌리깊은 장애인 혐오 정치의 구조적 징후로 보인다.
2. 정치권의 비판과 그 한계: ‘정쟁’으로 소모되는 장애 인권
형식적으로 보면, 이번 사건은 ‘보수·진보 진영을 가리지 않고’ 비판이 쏟아진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부적절한 발언”이라며 거리를 두었고, 송언석 원내대표의 “자그마한 내부 문제에 왜 집착하느냐”는 해명(?)은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더불어민주당 서영석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지도부의 책임을 물었고, 진보 정당과 여성·장애인 정당들은 박민영 제명과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조금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양당의 공통된 한계가 분명해진다. 보수는 이를 “내부 갈등 관리”와 “청년 지지층 이탈 방지”의 문제로 축소했고, 진보는 “여당의 도덕성 타격”과 “정치 공세의 기회”로 활용했다. 어느 쪽에서도 이 사건을 계기로 ▲ 장애인의 정치 대표성, ▲ 장애인 비례제의 취지와 구조, ▲ 공적 영역에서 장애를 둘러싼 혐오 표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되짚으려는 진지한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번 사건은 “누가 더 장애인을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 인권이 여전히 정책의 중심이 아니라 정쟁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정쟁이 끝나는 순간 장애인은 다시 주변부로 밀려나는 구조를 드러낸 사건이다. ‘거친 표현’ 몇 마디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표’, ‘팬덤’, ‘프레임’의 소재로만 취급해 온 정치 전체를 묻지 않으면, 이 사건은 또 하나의 “하루짜리 정치 스캔들”로 소비되고 말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비난을 하자면, 장애인의 ‘표’는 ‘표’도 아니다.
3. 장애인 인권단체의 분노가 가리키는 것
반면 장애계와 인권단체의 반응은 훨씬 더 구조적이고, 그래서 정치권의 태도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는 박민영 발언을 “장애인의 정치 참여 자체를 부정하는 인권침해”라고 규정하고, 단순 사과를 넘어 사퇴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성명을 통해 이를 “혐오와 갈라치기 정치의 전형”이라고 비판하며, 만평과 풍자를 통해 “권모술수 정치”의 민낯을 드러냈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이번 사건을 “여성·장애인에 대한 이중적 혐오”,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마음껏 혐오해도 된다는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박민영의 발언은 ▲ 특정 장애인 의원에 대한 인신공격을 넘어, 장애인 비례대표 제도 전체를 ‘과도한 특혜’로 낙인찍고, ▲ 장애인을 “정상적인 경쟁 질서를 왜곡하는 존재”로 묘사하며, ▲ 장애인의 정치 참여를 헌법적 권리가 아니라 ‘할당받은 자리’ 정도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즉, 이번 사안의 핵심은 단지 “장애인을 비하했다/안 했다”라는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를 사회적 차별 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경쟁에서 ‘특별히 배려받는 집단’으로 위치시키는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쌓으려는 전략, 바로 그 지점이 문제다. 장애계의 분노는 이 전략 전체를 향해 있다.
4. 공적 공간에서 노골화되는 장애인 비하: ‘인질극’에서 ‘과도한 할당’까지
이제 독자적인 논의로 들어가 보자. 필자는 이 사건을 “공적 공간에서 장애인 비하가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고 싶다. 박민영의 발언은 어제오늘의 돌출적인 예외가 아니다. 이미 2020년대 초반부터, 한국 정치의 공적 언어 속에서 장애인에 대한 비하와 폄하가 점점 숨기는 법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장면이 2022년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때였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에 대해, 당시 보수 정치인과 일부 언론은 “출근길 시민을 볼모로 잡는 시위”, “인질극”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장애인의 권리 요구는 ‘정상 시민’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기적 행동으로 재규정되었고, 장애인은 순식간에 “볼모를 잡는 사람들”로 호명되었다. 문제는 이 표현들이 단지 거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정치적 지지층 결집을 위한 언어 전략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2024년 국회에서는 “정신 나갔다”라는 표현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정신장애인 비하라는 문제 제기가 나오자, 곧바로 “그 정도는 관용적 표현”,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치다”라는 반격이 뒤따랐다. 이 논쟁은 “정말로 누군가의 정신질환을 비하할 의도가 있었느냐”라는 의식/무의식의 문제로 좁혀졌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 왜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정신 상태를 깎아내리는 표현을 ‘정치적 공격의 수단’으로 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가.
• 그 표현들이 실제 정신장애인들에게 어떤 상처와 낙인을 남기는지에 대해서는, 왜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리고 2025년, 박민영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표적이 된 장애인이, 우연히 지나가던 ‘익명의 장애인’이 아니다. 같은 당 소속, 그것도 시각장애인 비례대표 의원이다. 여기서 장애인은 더 이상 “연민의 대상”도, “도움을 필요한 이웃”도 아니다. 내부 권력 투쟁과 계파 갈등의 맥락에서, 장애인은 “정략적 타격을 위해 호출되는 약점”이자 “비난 가능한 정체성”이 된다.
이 세 장면은 서로 다른 사건이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 장애인의 권리 요구는 “공공을 방해하는 인질극”으로, ▲ 장애에 대한 혐오 표현은 “관용적 표현”으로, ▲ 장애인의 대표성 확대는 “과도한 할당과 특혜”로 재규정된다.
다시 말해, 장애인은 “권리를 주장하면 이기적이고”, “언어적 공격의 소재로 쓰여도 별 문제 없으며”, “대표성이 확대되면 특혜를 받은 집단”이 되는 구조가 눈앞에서 굳어지고 있다. 공적 공간에서 장애인 비하를 둘러싼 담론은, 더 미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노골적이고 전략적으로 변해 온 것이다.
5. 극우화, 팬덤 정치, 그리고 ‘인셀 정치’의 등장
이 흐름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이번 사건이 벌어진 공간이 어디였는지를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이다. 박민영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극우 팬덤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자와 웃음을 섞어가며 장애인과 여성을 향한 조롱과 폄하를 주고받았다. 유튜버는 “장애인인 걸 천운으로 알아야 한다”는 식의 언사를 서슴지 않았고, 박민영은 눈앞의 호응을 향해 장단을 맞추었다.
이 구조는 한국 정치의 ‘청년 극우화’와 깊이 연결된다. 2030 남성 지지층 일부는 이미 여성혐오, 퀴어혐오, 장애인혐오를 섞어 만든 수사에 익숙해져 있고, 이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격”, “진실을 말하는 용기”로 소비한다. 박민영은 이 지지층이 원하는 언어를, 정확히 그들이 선호하는 플랫폼에서, 요구되는 톤으로 제공했다. 그것이 이번 발언이다.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서는 박민영을 향한 비판 가운데 “인셀의 전형”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런 조롱 역시 문제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특정 인물의 인격이 아니라, ▲ 여성·장애인을 향한 혐오 표현이 팬덤 정치의 결속을 강화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고, ▲ 정당은 이 접착제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점, ▲ 그 과정에서 혐오 표현의 ‘정치적 효용’이 내부적으로 용인·합리화되는 구조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극우화는 단지 ‘사상의 급진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존엄을 정치적 유희의 재료로 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감수성의 형성을 뜻한다. 박민영 발언의 가장 큰 문제는, 이 감수성이 이미 일정 수준 이상 공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쉽게 “장애인 할당이 너무 많다”는 말을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6. ‘과도한 할당’이라는 말이 지우는 것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정면으로 제기해 보자.
“장애인 비례대표가 정말 ‘너무 많아서’ 문제인가?”
한국 국회의 장애인 비례대표 수는 역사적으로 극히 적었고, 여전히 장애인의 인구 비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비례 할당이 과도하다”는 말은, ▲ 장애인을 이미 ‘충분히 대표된 집단’으로 설정하고, ▲ 나머지 자리는 ‘정상적인’ 인물들이 차지해야 할 정당한 몫으로 간주하며, ▲ 장애인을 위한 정치적 배려를 “정상성에서 벗어난 예외조항”으로 취급한다.
즉, 이 프레임은 장애인을 ‘부족하게 대표된 집단’이 아니라 ‘과잉 대표된 집단’으로 뒤집어 놓는다. 실제 데이터를 보거나, 장애인의 정치 참여 역사와 현실을 살피는 수고는 생략된다. 대신 “상식적인 느낌”만이 기준이 된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국회에 장애인 의원이 이렇게 많은데도, 여전히 특혜를 달라고 한다”는 식의 말이 생각보다 쉽게 오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식의 기저에는, ‘정상적인 정치’의 기준을 비장애 남성, 비장애 다수자에 두는 시선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장애인은 예외적 존재이며, 그들의 진입은 “정당한 경쟁을 왜곡하는 할당”으로 불린다. 박민영의 발언은 이 구조를 가장 노골적인 단어로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에이블리즘(ableism)’이라는 개념을 소환해야 한다. 에이블리즘은 한 사회가 특정한 신체·정신 능력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열등한 존재로, 혹은 끝없는 보살핌과 통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취급하는 구조적 차별을 뜻한다. “장애인 비례가 너무 많다”는 말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정치인”의 기준을 비장애인에게 두는 에이블리즘의 언어이고, 장애인의 정치 대표성을 다시 주변화하려는 시도다.
7. 혐오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순간, 민주주의는 조용히 붕괴한다
박민영 사건은 일회성 실언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정치의 공적 언어가 얼마나 빠르게 후퇴하고 있는지, 우리 정치의 감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다.
오늘 한국 정치에서 약자를 향한 혐오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정치적 비용이 낮고, 정치적 효용이 높기 때문이다. 정당은 이를 알고 있다. 정치인은 더 잘 안다. 그래서 혐오는 언제나 가장 먼저 약자를 향해 투사된다. 약자는 언제나 공격하기 가장 쉽고, 반격할 수단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네 가지 질문을 우리 앞에 다시 세운다. 첫째, 혐오를 ‘정치적 솔직함’으로 포장하는 분위기를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 둘째, 장애인의 대표성을 ‘정치적 정상성의 예외’로 취급하는 시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셋째, 팬덤 정치와 극우화가 만들어낸 저급한 감수성의 시장을 그대로 둘 것인가. 넷째, 공적 언어의 기준이 무너지는 속도를 우리가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가.
장애인을 향한 비하 발언은 단지 특정 집단을 향한 공격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를 공격해도 되는가’라는 정치의 도덕적 경계선을 재설정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경계선이 한 번 낮아지면, 그것은 곧 다른 약자, 다른 소수자, 결국 정치적 힘이 약한 모든 시민에게 순차적으로 확장된다.
장애인 비하가 반복되는 사회는 약자를 향한 혐오가 구조화된 사회이고, 그 구조를 정치가 이용하기 시작한 사회이다. 이 사건을 하루짜리 스캔들로 넘기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정치의 감수성을 어디까지 복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면, 한국 정치의 퇴행을 멈출 첫 단초가 될 수 있다.
혐오의 언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순간, 민주주의는 조용히 붕괴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잘못했는가”를 넘어 “우리가 어떤 정치의 언어를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그 선택은 정치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건을 기억하는 우리 전체의 책임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