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의 소리와의 전쟁] 내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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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트 가방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이금자
▲퀼트 가방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이금자
▲이금자 더인디고 집필위원
▲이금자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이금자 집필위원] 청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매일 상처 하나를 가슴에 담아 오늘을 견디는 것이다. 남이 주기도 하고 내가 만들기도 한다. 수어 쓰는 문화에서 사는 것이 아닌 구어를 사용하는 사회에서 사는 청각장애인 나, 만나기 싫어도 만나고 가기 싫어도 가게 된다. 내 삶이고 내 일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은 즐겁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만나오면서 많은 작가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그렇게 지켜온 모임에 이제 남은 인원은 세 명이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여러 가지를 한다.

각자가 들고 온 바느질거리를 풀고 바느질을 시작한다. 나는 통역 앱을 옆에 켜 두고 대화한다. 이 통역 앱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있는지조차 몰랐다. 통역 앱이 있기 전에는 들려오는 소리조차 없이 바느질만 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자기 보호다. 예전에는 바느질 중에는 대화에 끼지 않는 것이 상처이자 아픔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통역 앱이 있든 없든 내 할 일만 한다. 작품, 바느질, 대화, 이 모든 걸 한 번에 신경 쓰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청각장애인만의 피곤함이다. 눈으로 하는 대화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통역 앱이 없었을 때는 바느질 중 하는 대화는 대충 알고 있어서 신경을 끈다. 신경 쓰면 힘들다. 지난 시간에 비하면 현재는 즐기면서 하는 모임이자 수다다. 모임에서 사람을 만나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자기 연민도 많지만, 더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오후가 되었다. 다과를 먹으며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수다에 합류한다. 속으로 웃는다. ‘나는 대화가 정해졌네.’ 혼자 하는 속엣말이다. 슬프지는 않다. 오래 겪어온 일이라서 무감각하다. 청각장애인은 바로 대화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못 들었으니 지금 어떤 대화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눈치 게임 같은 나의 대화, 꺼두었던 통역 앱을 열어서 책상에 올려놓고 고개 숙인다. 또 다른 말을 한다. ‘새롭다.!’ 통역 앱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몇 년 더 빨리 알았더라면 누구를 만나든 그 만남이 두 배로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바느질을 하면서도 대화에 끼일 수 있다. 옆에 있던 선생님이 물어온다, “쌤! 우리는 바느질하면 음악을 틀어놓기는 하는데 쌤은 음악을 들을 수 없는데 바느질할 때 심심하지 않아요?” “심심하기는 하죠, 그런데 나는 자체 음악을 들어요. 하하” “자체 음악이요? 그런 노래가 있었나?” 서로 얼굴 마주 보고 갸우뚱한다. “내가 부르고 내가 듣는 노래!” “아!~하하하” 같이 웃는다. “그냥 조용히 바느질만 하지 다른 거 없음, 익숙하기도 하고, 근데 가끔은 답답해서 기분 전환으로 소리 좀 지르는 하하.” “상처 주자고 물어본 말은 아니고 우리는 서로 다 아니까 궁금해서.” “상처는 무슨”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한다.

오래전 통역 앱 없이 관계를 이어가면서 열 명이 넘는 모임에서 하는 버릇 아닌 버릇이 하나가 있었다. 회의에서 알아야 할 것들도 있지만 몰라도 그만인 것들도 있다. 오랜 경험이다. 피곤하고 힘들어 하기보다 그냥 어차피 회의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공지가 올라오는 것이어서 알아들어야겠다고 애쓰지 않았다. 대신 마시고 있는 ‘차’에 집중하는 시간이 그것이다. 커피 마시면 그 쓴 커피에 대고 ‘이건 약도 아닌데 왜 이렇게 쓸까.’ 점심으로 나온 김밥을 먹으면서 ‘단무지 좀 가늘게 썰어 넣지 너무 두껍잖아,’ 옆에 놓여있는 육수를 마시면서 ‘이건 괜찮네, 가다랑어인가!’ 혼자 하는 대화다.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니 수다가 끝나가고 다음 모임 시간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물어본다. “언제인데요?”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모르겠어요.”

수다에 끼어봐야 대꾸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투명인간이었으니까. 하루 일상이 그렇게 지나가던 예전이다. 청각장애인으로 사회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건 아주 큰 모험이다. 농인 문화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 문화에서 사는 것은 외국인보다 하잖은 대우를 받는 한국인이다. 외국인에게는 세상 친절하지만 청각장애인인 나는 피한다. 외국인은 들리지만 언어가 다르고 청각장애인은 못 듣지만 언어가 같다. 외국인에게는 핸드폰을 들고 대화하려고 애쓰지만 나에게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마주침이 다르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저 소통이 안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럼, 외국인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대화를 어떻게 하지!’ ‘말의 뜻을 이해는 하는 걸까?’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말이다. 설명을 듣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을 묻고 또 물어볼 때 들려온 말 “이해 안 돼요? 왜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지!” 충격이었다. 어리숙한 시기여서 알아듣고도 대응하지 못하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곱씹고 또 곱씹는다. ‘아닌데 나 말귀는 알아듣는데….다만 ….다만…’ 말 뜻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접하는 제도, 수업에서 한 번에 이해하고 배우기란 어려워서 그런 건데, 그 수업이 소리가 들리는 저 사람들에게는 한 번에 이해가 되었을까?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 라는 말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의 특권이다. 말귀를 못 알아먹느냐고 욕 먹지 않을 특권.

나는 말은 어눌하지만 대화는 된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수다도 떤다. 친한 지인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지만 꼭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밥 한 끼하고 수다 떨고 헤어질 때쯤 시장을 거닐고 있었다. 좌판에 늘어져 있는 마른오징어가 먹음직스러워서 가격을 물어봤다. 만원이라는 말이 들려오기 전에 지인이 말을 가로챈다. “이 아줌마 귀가 안 들려!” “!!!!!” 제 딴에는 나를 도와주어야겠다 싶었겠지만 내 기분은 좋지 않았다. 사려던 마음을 접고 돌아선다. 오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내 속이 좁아서일까? 굳이 그런 말을 해야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또 한 사례가 있다.

청량리역에 있는 백화점에 가기로 하고 만난 아는 동생과 지하철에서 내려 올라가려고 걷는 중 어느 어르신이 내게 물어왔다. “여기 큰 병원 어디로 나가면 되요? 가본 적이 있지만 출구는 기억나지 않아서 잠시 생각하다 5번 출구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말한다. “이 언니 못 들어요! 우리도 잘 모르겠어요.” 나를 옆으로 흘깃 쳐다보면서 지나가던 어르신의 그 눈길이 왜 그렇게 싫던지 화가 났다. 그리고 말한다. “뭘 몰라!!! 5번 출구잖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응!!….” 당황해서 쳐다보던 얼굴이 보기 싫었다. 이번에도 상한 기분은 진정되지 않는다. 내가 못 듣는 것이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 것일까. 가족이 상처를 주듯 친한 지인의 무개념한 말들이 상처가 될 때도 많다.

나를 생각하고 배려하고 도와줘야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겠지만 내가 한 내 행동에 어떤 대화가 오가거나 말거나 지켜보는 것이 청각장애인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때는 ‘이 사람 귀가 안 들려요!’가 아니라 말없이 소통의 다리가 되어 도와주는 것이 도움이 되고, 또 그런 것들이 배려가 아닐까. 왜?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좋은 기억이 되어 존중하는 마음이 우러나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청각장애인의 마음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청각 장애 퀼트 작가 퀼터스입니다. 수어는 배웠지만 잘 하지 못합니다. 제가 사는 세상은 비장애인 사회입니다 부딪히고 깨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청각장애인의 삶과 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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