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최병호 집필위원] 애니 「장송의 프리렌」 을 정주행했다. 풋풋한 청소년 시절에 빠졌던 판타지의 가슴 두근거리는 향수를 깨우고, 모험을 마친 후에 펼쳐지는 서사의 신선한 전개가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주인공 프리렌은 천 년 넘도록 살아있는 아득한 신화와 역동적인 역사, 평화로운 현재를 가로지르는 엘프라는 희소하고 신비로운 종족이다.
그녀는 마왕을 물리친 마법사이자 전설적인 파티원이었다. 하지만 십 년 동고동락한 용사 힘멜이 죽게 된 뒤에야 인간의 짧은 수명을 머리로 이해했으면서도, 그를 가슴으로 헤아리지 못한 자기 무심한 마음을 탓하며 펑펑 울고야 마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국산 OTT로 더빙판을 시청했다. 한 작품을 다시 보는 건 드문 일이다. 그만큼 내게 여러모로 재미와 의미를 안겨주었단 뜻이다. 눈길을 확 사로잡는 건 엘프가 가진 가늠조차 어려운 긴 목숨이다. 과거엔 듀센 근육병이 삼십 세를 넘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의학의 발전과 체계적 관리로 나는 운 좋게 사십 대 중반에도 생존 중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동료 인간들이 노년까지 살아도 프리렌이 누리는 장수 앞에선 한낱 꿈같은 소풍이었다. 그들과의 모험이 끝나고는 백 년을 취미 삼아 마법을 수집하면서 느긋이 지낼 정도로 시간 감각이 남다르다. 그런 불사에 가까운 그녀가, 청년에 숨을 거두는 다수와 중년을 겨우 버티다가 저무는 소수로 이루어진 듀센 환우들을 곁에서 보게 되면 어떤 감정과 생각이 들지 궁금해진다.
나는 수명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가졌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짧으면서, 동병상련 환우보다 살짝 길게 살고 있는 위치 때문이다. 그래서 단명과 장수를 함께 고민하게 된다. 프리렌은 스승과 동료들을 먼저 잃은 상실감에 슬퍼하지만, 그들과 나눴던 크고 작은 진심을 추억하면서, 애틋한 과거와 생생한 현재, 희망찬 미래를 수놓는 풍요로운 행복을 누린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본다. 내가 떠나고 남겨질 부모님과 여동생, 조카를 상상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간 환우 선배와 동료, 친구들을 회상하면, 아쉬운 상념과 충만한 마음이 겹친다. 그렇게 힘멜과 프리렌의 시선과 인생을 한가슴에 끌어안는 건 신만이 허락한 축복이다. 그 귀한 감각과 사유를 언어로 빚고 남기는 하루하루가 설레는 모험이자 뜻깊은 여행이기도 하다. 이 애니는 그런 점에서 날 멋지게 만든다.
또 인상적인 장면은 평소에 그녀가 가공할 마력을 자연스럽게 숨기다가 결정적인 승부에서 유감없이 발휘하는 일이다. 성실한 수련과 겸손한 자세가 몸과 삶에 배어있는 물오른 경지일 것이다. 프리렌이 마법을 통해 인생을 꽃피우듯 내게는 글쓰기가 과시하지 않는 꾸준한 실천이자 회피하지 않는 투명한 성찰이다. 페북 포스팅과 칼럼 연재를 친숙한 생활어 중심으로 전개하고, 꼭 필요한 건조한 개념어와 추상어를 사용할 땐 생생한 감각어를 섞거나 미적인 비유를 엮는다. 그렇게 일상 중에 실력을 갈고닦으면서 고통이 성숙으로 익고, 생활 가운데 장애가 지혜 맺어간다.
스승 플람메에게 배운 꽃밭을 만드는 마법으로, 프리렌은 길 잃고 겁먹은 어린 힘멜을 위로해 줬었다. 장성한 그가 기억하고 찾아줘서 오래 추억될 모험을 겪었다. 제자 페른도 그들과 똑 닮아서 소박하게 지내면서 더불어 걷는 여정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처럼 우리 인간 역시 서로에게 귀한 인연이자 고유한 존재로 선한 빛을 비추고 온기를 건넨다.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의 이루릴과 애니 「장송의 프리렌」의 프리렌, 조화의 종족 두 엘프가 잔잔한 바람이자 든든한 나무가 되어서 나를 반기며 손을 흔든다. 기억은 살리고 돌보는 사랑의 마법임을 픽션 속 그녀들이 깨우쳐 준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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