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잠이 오지 않아 유튜브를 켰다. 첫 화면에 동물의 대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올라와 있었다. 평소 동물의 생태에 관심이 컸기에,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백만 마리가 넘는 누 떼가 비와 풀을 찾아 대지를 가로지르는 장면이 펼쳐졌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장관 앞에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1년에 3,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지자, 경외감이 밀려왔다.
카메라는 인도양의 크리스마스섬으로 옮겨졌다. 약 1억 마리에 이르는 홍게들이 번식과 산란을 위해 숲에서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 시기가 되면 섬 전체가 붉게 물든다고 했다. 도로와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이어지는 느릿한 붉은 행렬은 인간의 질서마저 멈춰 세웠다. 이어 연어가 등장했다. 연어는 바다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 수천 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생을 마친다. 알래스카에서 뉴질랜드까지 11,500km를 날아가는 흑꼬리도요새, 연약한 날개로 6,400km를 날아 멕시코의 숲에 도착하는 모나크나비의 이동도 소개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대이동을 자연의 섭리나 질서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동은 질서가 아니라 생존이다. 이동하지 않으면 먹이를 얻을 수 없고, 번식할 수 없으며, 종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길은 선택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떠나야 하는 길이다. 이 대이동의 세계에는 분명한 원칙이 하나 있다. 이동의 위험이 개체의 책임으로 전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가 더 강한 다리를 가졌는지, 누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는 생존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 길은 무리 전체를 위해 형성되고, 속도는 가장 느린 개체에 맞춰진다. 자연은 이동을 개인의 능력 시험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같은 동물(動物)인 인간은 다를까. 동물은 문자 그대로 ‘움직이는 존재’,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을 뜻한다.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순간, 존재의 의미는 위태로워진다. 인간 역시 이동을 통해 먹을 것을 찾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향해 왔다. 이동은 공동체를 만들었고, 교류를 낳았으며, 문명을 확장했다. 인간 사회는 이동의 역사 그 자체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오랫동안 이동을 개인의 능력 문제로 취급해 왔다. 빠르게 걷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이고, 계단을 오르지 못하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로 여겨졌다. 정해진 관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일상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시험이 애초에 공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출발선부터 서로 다른 몸들이, 오직 하나의 몸만을 기준으로 한 규칙 앞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은 이동의 연속이다. 학교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일터로 향하며, 병원과 마트를 오간다. 삶은 점과 점 사이의 이동으로 이루어진다. 그 모든 지점에 닿기 위해서는 이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자유롭게, 필요할 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권리’, 즉 이동권이라 부른다. 이동은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접근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작동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이라는 특정한 몸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에서 장애인의 이동은 오랫동안 권리가 아니라 배려의 문제로 취급되었다. “가능하면”, “여건이 되면”, “예산이 있으면”이라는 말에서 이동은 시혜가 되었고, 권리는 복지 서비스로 축소되었다. 저상버스의 대수, 엘리베이터의 설치 여부, 대기시간 몇 분이라는 숫자로 관리되었다. 삶의 가능성은 그렇게 행정 지표로 환원되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특별교통수단, 휠체어로는 탑승조차 불가능한 시외·고속버스, 고장 난 채 방치된 엘리베이터. 이동하지 못하는 현실의 부담과 위험은 여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동권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리이면서, 다른 모든 권리에 도달하게 하는 권리다. 배울 권리, 일할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 사랑하고 애도할 권리까지 삶의 권리는 이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권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숨은 쉬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1월 22일은 서울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 추락해 아내가 숨지고 남편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한 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그 죽음은 사고로 기록되었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임시방편의 리프트, 이동을 개인의 감내에 맡겨 온 구조가 만들어 낸 참사였다. 25년이 흐른 지금, 무엇이 바뀌었는가. 법과 제도는 만들어졌고 수단은 늘어났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장애인의 실제 삶 속에서 이동권은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가. 여전히 누군가는 같은 위험을 감내하며 이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동물의 대이동은 분명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동할 수 있을 때 생명은 이어지고, 이동이 막히는 순간 삶은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동권을 말하는 일은 복지를 논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치와 생존에 관해 묻는 것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는 사회란, 누가 더 잘 견디는지를 묻지 않는 사회다. 이동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존재가 없고, 어디로 가기 위해 매번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권리는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권리는 삶이 된다. 이동권을 말하는 일은 불편을 줄이자는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누구의 삶을 ‘감내해도 되는 위험’으로 분류해 왔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준을, 지금 여기서 다시 쓰자는 요구다.
[더인디고 THE INDI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