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최병호 집필위원] 1980년대 유년기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은 몸을 움직여 노는 게 다였다. 그런데 나는 근육병 때문에 잘 뛰지도, 힘이 세지도 못했다. 그런 아들을 위해 엄마와 아빠가 합심해 두껍고 빳빳한 종이를 구해서, 딱지를 수북이 접어줬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다음 날 아침에 신바람 나서 골목으로 나갔지만, 힘과 순발력이 좋은 애들을 이길 리 없어서 한나절 만에 다 잃고, 괜히 참견하다가 욕을 먹기도 했다. 친한 애들이 편들어 주면 기가 살아서 어깨를 으쓱하게 되면 다행이었다.
내가 뭘 잘할 수 있을까? 며칠 머리를 굴리다가 팽이가 떠올랐다. 끈을 뾰족한 심부터 몸체에 돌돌 감아서 한 손에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꽤 순조로웠다. 이제 잽싸게 날려서 팽이가 뺑글뺑글 돌기만 하면 된다. 손목에 스냅이 걸리질 않았고, 팽이는 손아귀를 벗어나 맥없이 굴러떨어져 멈췄다.
마당 그늘진 구석에서 아무도 안 볼 때 시도해 봐도 말짱 도루묵이었다. ‘난 왜 이렇게 생겨 먹은 거야? 보통 애들은 쉽게 하는 걸 난 왜 못하는 거야?’ 한숨만 나왔다. 에잇, 이까짓 거 안 해! 애꿎은 팽이를 저만치 있는 힘껏 던지고, 다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팽이치기는 사소한 일이었다. 1학년 때 줄넘기 연습을 해오라고 했는데, 두 손으로 줄을 넘기고, 늦게 점프해서 두 다리에 걸리는 내 동작과 자세는 몸 개그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수치스러워 차마 보기 힘들었고, 줄이 발꿈치에 자꾸 걸려서 분했다. 엄마가 학교에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난 체육 수업에서 열외가 됐다. 불 꺼진 교실에 홀로 남겨져서 기운 빠지는 것이 모두가 지켜보는 운동장에서 웃음거리 되는 일보다 참을 만했다.
나는 숨 쉬는 힘도 약했다. 풍선 불기가 안 되는데, 리코더와 아코디언 연주가 가능할 리 없었다. 현기증이 나서 얼마 불지도 못했다. 그렇게 음악 수업에서 열외가 돼버렸다. 늘 깍두기로 겉도는 소년. 설상가상으로 3학년 2학기 마칠 무렵부터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4학년부터는 엄마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등하교했다. 처음에는 동네와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웠다. 얼굴이 홍당무로 변할지 몰라서 애써 시선을 피했다. 6살 때 서울성모병원에서 휠체어에 탄 환자들을 처음 봤었다. 그때 충격받은 기억을 떠올리면 울렁거렸다. 나도 저렇게 나빠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이 무섭게 엄습했다.
5학년 담임선생님께 일기장을 선물 받았다. 어깨를 살짝 내려온 파마머리에 수더분한 얼굴로 손뜨개 조끼를 즐겨 입었던 40대 여성. 아이들 장난도 잘 받아주고, 눈높이 맞춰서 말 걸어주는 분이었다. 나를 6학년까지 가르치길 바랐으나, 먼 학교로 가시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담하고 돌아온 엄마는 선생님이 주신 작은 자물쇠가 달린 꽃무늬 일기장을 내미셨다.
그 선물을 받고서 틈틈이 일기를 썼다. 떠난 선생님의 튤립을 닮은 미소와 토닥이는 손길을 떠올리면서, 방바닥에 엎드려 연필로 꾹꾹 눌러쓰는 순간이 행복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분풀이로 갈겨쓰기도 했고, 20대 후반부터 17년 넘게 꾸준하게 페이스북 포스팅을 남겨오고 있다. 그렇게 솔직한 글쓰기를 놓지 않은 덕분에 날 받아들이고, 언어를 찾아 팽이처럼 돌리게 됐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유치해 보이던 분홍 일기장이 내 창작 출발점이었으니 말이다. “맞아, 난 환자이자 장애인이야. 돌봄에 기대 사는데, 글 쓸 때면 자유로워.” 그 마음이면 충분하고, 나답게 누려서 뿌듯하다. 동시에 언제든 위독해지거나 죽을지 모를 운명이다. 그런데 우려와 다르게, 하루가 더 귀하고, 일상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초등학교 1학년 조카가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쫑알쫑알 떠들면서, 등교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모든 날이 편하고 좋지는 않아도, 일상이 건네는 온정이 살린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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