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이금자 집필위원] 지금의 나는 긴 터널에서 나와 밝은 빛 속에서 살고 있다. 청각장애인이지만 이제 다름을 이해받으며 아무 편견 없이 만나고 대화한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이제는 서로 상대를 알았고 내가 듣거나 말거나 그들이 말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그저 평범하게 작업을 하고 모임을 한다. 비장애인 사회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내 장애의 설움은, 낮은 곳을 지나 높은 곳에 올라서야 비로소 타인에게 함부로 건드려지지 않게 되었다.
내가 청각장애인이고 소리를 못 들음에서 하는 오해일 수도 있지만 낮은 자리에서는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 경험해 왔다. 높이 있어야 존중받는다. 오롯이 눈으로 모든 것을 담고 말하는 청각장애인이 눈에는 띄지만, 관심이 가는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서로 오고 가는 대화가 길지 않아도 말하는 것을 눈으로 들어야 하는 청각장애인의 그 행동 하나가 대화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가 보인다. 눈으로 듣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의 차이다.
10여 명이 원탁에 둘러 모여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안건을 말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지만은 않는다. 귀로 들으며 잡담도 하고 딴짓도 한다. 하지만 나는 시종일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봐야 했다. 흐트러짐 없이 말 한마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쩌면 청각장애인은 자존심을 내려놓아야만 일할 수 있는 듯하다. 오해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내 장애를 모르는 사람은 힐긋거리며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저 남자에게 관심 있나.’ 하는 표정으로 훔쳐본다. 내 마음은 불편하다.
이 자리에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대표다. 이 외에는 모두 퀼트 작가들인 여자다. 내 장애를 아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불편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오가 되어간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아직 시간이 이르기는 하지만 배가 고프네요. 점심 먹고 하면 어떨까요?”
“아!~ 배고프세요? 그럼,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밥 먹고 할까요!”
대표가 답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잠시의 수다 타임이 끝나면서 다시 회의가 시작됐다.
“저 잠시 회의 들어가기 전에 한마디 해도 될까요?”
“네! 하세요”
그렇게 뒤늦게 나를 소개하게 됐다.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그래서 얼굴을 봐야 알아듣거든요. 제가 대표님 얼굴 뚫어지게 본다고 해서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제야 대표가 덧붙였다.
“아!~이금자 작가님은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제가 소개한다는 걸 깜박했네요.”
이후 내게 쏟아지던 시선은 사라지고 회의가 진행된다. 때로는 침묵보다 말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아가면서 용기와 자존감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오랜 경험으로 나는 이제 말을 아낀다. 오해를 받고 오해를 쉽게 하는 것이 청각장애인이다. 상대가 아는 것을 말하고 서로가 아는 것만 대답한다. 똑같은 말이라도 청각장애인의 말은 모호하게 취급받고 건청인의 말은 늘 옳게 여겨지는 경험을 수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다름을 이해받고 들리지 않음을 공감받을 수도 있겠지만.
취미로 하는 퀼트는 혼자 하지만 작가로 활동하는 퀼트는 함께 한다. 많은 대화가 오가고 의논하고 같이 작품을 평한다. 서울역 회의실에서 열린 세미나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울 일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세상의 무게를 나 혼자 짊어진 듯한 무거움은 하루가 한 달 같았었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조용하지만 외롭다. 소리의 즐거움, 수다의 재미, 사람 모이는 곳에는 소리가 재미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고립이다. 고립감의 무게 또한 나를 짓누르기도 했다.
세미나가 시작되면서 앞자리에 앉아있는 나는 무슨 말을 할지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친해져 서로 이야기하고 즐기지만 그렇지 못한 나는 즐기지 못한다. 그 순간 생각했다.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여기는 수업을 듣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자. 기억하고 있는 것은 복습하고 모르는 것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만 앉은 자리에서 알려고 애쓴다면 하루가 너무 피곤하고 쉽게 지쳐버린다. 청각장애인은 배움에서는 편하게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듣고 말하는 입장이라 귀로 대화하는 사람들과는 피곤함의 차이가 다르다.
청각장애인이 건청인과 함께 일하고 배운다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소리로 접하지 못했던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은 많지만 그렇지 못할 때 자신을 내려놓고 마주하는 마음의 아픔은 혼자만 아는 비밀이다. 배운 것은 공유하지 않았고 모르는 것을 물었을 때 ‘모른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럴 수 있지!’ 할 수 있는 것들도 그렇게 못하는 것은 청각장애인이 가지는 습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 오해다. 건청인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청각장애인은 소통의 오류에서 나오는 이해하지 못한 마음이다.
이사하면서 예산에 살고 있는 지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일 서울 갑니다. 용인에서 만나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 내일 시간 맞춰갈게요.” 몇 주 전에 한 약속이다.
“우리 용인에 살고 있는 오 선생님 집에서 신년회 하면서 신나게 놀아 보자고요”
“하하하 신년 선물 한 보따리 싸갑니다. 용인에서 만나요. ” 직업이 정원 아티스트다. 나무와 흙이 좋아 예산으로 내려간 지인이다. 편견도 다름도 없다. 서로가 알면 장애, 비장애라는 선은 사라진다. 사람과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건청인과의 교류를 피하지 말자.
청각장애가 있다고 어두움을 좋아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다. 마음을 열고 세상을 넓게 본다면 장애가 있어도 살아가는 길은 열려있고 희망도 있다. 요즘 시대는 젊은 날 내가 살았던 시대보다 기회도 많고 도움도 많이 되는 세상이다. 많은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해 주지는 않는다고 힘들어할 것도 없다.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들리고 안 들리고가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나 하기 나름이다.
내가 움츠려들고 얼굴에 어두움이 깃든다면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가오다가도 돌아가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농인은 그들의 문화가 있고 자신들만의 언어인 수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농인에 대해 쓰기에는 조심스럽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주어진 환경과 삶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소리가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져가는 단계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힘들어하는 삶,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청각장애인들에게 들려주는 내 이야기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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