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졸업식에서 본 나의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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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과 장학금 ©픽사베이
▲졸업과 장학금 ©픽사베이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며칠 전, 담임 선생님이 나와 영심이를 불렀다. “야들아, 1등상이 장학금 1만 원이다. 2등인 미영이가 힘들게 사니까 상을 바꾸면 좋겠는데, 영심이 개안체?” 2등상은 학교장상이라 공책 몇 권이라고 했다. 1만 원으로 수백 권 살 수 있는 공책인데 영심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떳떳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 그 돈이면 중학교 입학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 늘 돈 걱정하는 엄마에게 큰 기쁨이 될 거로 생각했다. 영심이에게 고맙단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렇게 결정 난 후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6학년 졸업생과 5학년 재학생들 앞에서 운동장 한가운데 조례대에 올라가 상을 받는데 후줄근한 옷차림이 마음에 걸렸다. 흰색 카라를 덧댄 검은색 교복 상의에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로 남들 앞에 서는 게 창피했다. 엄마 눈치를 보다가 용기 내어 말했다. “엄마, 나 졸업하면 만원이 생기는데 미리 바지 하나만 사 줄 수 있어?” 엄마는 나를 데리고 골목시장 옷집으로 데려갔다. 같은 반 아이가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바지를 샀다. 길이가 길어 엄마는 내 키에 맞춰 아랫단을 자르고 공그르기로 단을 처리한 후 입어 보니 너무 짧아서 복숭아뼈가 보였다. 아쉬웠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졸업식 날, 내가 상 받는 걸 눈치챈 사진사가 엄마에게 말했다. “아주무이, 따님이 상 받는데 사진 한 장 찍어 주지예?” 나는 속으로 엄마가 그래 주길 바랐지만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돈 없슈!”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엄마가 야속했다. 내가 받은 상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김부돌)상’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그 기구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우리나라 최고기관이라는 걸 처음 알았고 거금 하사한 그분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70년대 중반의 1만 원은 내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어차피 교복은 언니가 입던 걸 받아 입었기에 그 위에 덧입는 코트를 샀다. 허름한 교복을 가려주는 코트를 나는 3년 내내 즐겨 입었다. 가방과 교과서, 공책 등 나는 엄마 눈치 안 보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며 행복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장학금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한편으로 내가 가난한 걸 소문내는 것 같아 창피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중학교는 이런저런 장학금 제도가 많았다. 가가호호 가정방문 하던 시절, 담임 선생님들은 내가 어렵게 사는 걸 안타까워 하셨다. 장학금 수여 대상자로 나를 자주 추천했지만 나보다 더 힘든 아이에게 내가 밀리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이번 불우이웃 돕기 성금은 조미영 학생에게 전달한다”고 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내게 시선을 던졌다. 죄인처럼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표정이 걸렸는지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교무실에서 선생님은 “이름을 밝히지 말아야 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니 일기장 보고 뭐든 도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니를 난처하게 해삐따. 미안타.”

선생님은 내 손등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얹으며 진심으로 사과하셨다. 2천7백 원으로 기억하는 그 돈을 나는 엄마에게 장학금 받았다고 내놓았다. 불우이웃보다는 장학생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엄마는 덤덤하게 받더니 ‘잘됐다, 내일 느언니 회사 직원들 놀러온다는데 이 돈으로 회 좀 사서 대접해야겠다’고 했다. 엄마가 야속했고 언니가 미웠다. 이런 누추한 집에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오다니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언니 무리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내가 당한 창피로 언니가 행복한 것 같아 심술이 났다. 장학금이라고 했으니 내게 학업에 필요한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았는데 엄마는 그 돈을 유흥비로 썼다고 생각하며 나는 오래도록 꽁한 마음을 감추고 살았다. 훗날 엄마에게 말했더니 ‘내가 언제?’라며 모르는 척하는 표정에 웃고 말았다.

고등학교는 집안형편상 인문계를 포기하고 상고로 진학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이 모인 우리 학교는 한부모 아이들이 많았다. 거의 판자촌에 사는가 하면 산꼭대기 허름한 집 아이들이 많아 내 처지는 그리 나쁘지 않은 축에 속했다. 중 3년 동안 자주 받던 장학금을 고등학교에서는 한번도 받지 못했다. 가정환경 어려운 아이들이 태반이라 내 차례까지 오지 않았다.

중학교에서 상위권 성적의 아이들이 모인 우리 학교는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200점 만점에 172점이었다. 나는 174점으로 합격했는데 꼴찌는 내 차지가 될 것 같아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1학년 말 성적이 600명 중 4등이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어 도서반에 합류하면서 나보다 성적은 낮아도 책을 많이 읽고 독서 토론에서 두각을 보이는 친구들이 멋져 보였다. 사회 나가면 학교 성적보다 책 많이 읽은 아이들이 더 인정받겠다고 생각하면서 공부는 뒤로 미뤘다. 성적은 뚝뚝 떨어져 결국 전체 성적을 포함하여 나눈 취업 등수는 81등이었다. 다행히 1980년대는 경제성장이 한창일 때라 우리 학교 100등까지는 금융기관 취업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운이 좋아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하며 큰 고생 없이 16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쳤다. 은행에서 근무할 때 우연히 만났던 영심이에게 졸업식에서 상 바꿔줘서 고마웠단 말을 했더니 영심이는 잊고 있었다. 내게 중요한 일이 영심이에게는 그저그런 일이었다니 있는 자의 여유였을까?

우연히 참석한 조카 손주 초등 졸업식을 보면서 나의 10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먼지 날리던 운동장 대신 잘 꾸며진 강당에서, 600여 명이던 졸업생은 120여 명이었다. 특정한 아이만 교장선생님께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120명 모두 이런저런 상 이름을 붙여 상 받고 악수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졸업생 숫자보다 더 많은 학부모는 선물과 꽃다발을 들고 자녀들을 축하하고 있었다. 손주뻘인 졸업생과 자식뻘 되는 학부모들의 모습 속에 나의 어린 날과 젊은 날이 무채색으로 날아다녔다. 지그시 눈을 감았더니 아쉽고 안타깝고 부러웠던 것들이 그리움이라는 한 단어로 뭉쳐졌다. 반세기가 지나 되짚어보니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찬란한 날들이었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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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영님 너무 좋은 글이네요. 글 읽으며.. 여러가지 생각이 나고 많은 일이 떠오르는 시간이었습니다. ^^

샘글은 주제가 슬프거나 안타깝거나 즐겁거나에 상관없이 따뜻합니다
진솔하고 담백하게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에 잔잔한 감동과 해학도 담겨있어서 늘 반갑고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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