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이금자 집필위원] ‘장애인’이라는 말은 신체의 어느 한 곳이 불편할 때 붙여진 이름이다. 불편한 신체 부위에 따라 삶의 방식 또한 달라진다. 이 글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에 대해, 다섯 가지의 이해 지점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청각장애인은 농인도, 건청인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 점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청각장애인에게는 ‘말할 권리’보다 ‘말해야 하는 이유’가 먼저 요구된다.
청각장애인은 눈으로 대화하고, 눈으로 듣는다. 말을 시작하는 순간 설명과 시선, 해석이라는 버퍼링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그 과정은 늘 피곤함과 부담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다. 알아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는 말이 먼저 들려온다. 청각장애인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일일이 설명하고 다니지 않는다. 오래 함께한 사이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문제이고, 일로 잠시 스쳐 가는 사람에게까지 자신의 상황을 꺼내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상대에게 “나는 들리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이상, 눈앞에서 대화하는 사람이 청각장애인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말이 조금 어색하다고, 언어의 문제쯤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이렇다. 나는 관계를 정리하며 헤어질 때 이렇게 말한다.
“제가 귀에 이상이 있어서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음성 통화보다는 문자 메시지로 연락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연락은 전화로 온다. 이미 서로 대화를 나눠봤기 때문이다. 잊은 것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한동안 전화가 계속된다. 청각장애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이유와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설명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동안, 같은 설명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보면 청각장애인에게는 회의감이 밀려오고 쉽게 지친다. 그 과정에서 선택하게 되고, 또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늘 같지만은 않다. 관계가 사라질 때도 있다.
이해관계는 배려나 불편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의 관계다.
농인은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다. 건청인은 말과 소리로 정보를 얻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한다. 그러나 말은 할 수 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은 배려보다 정보가 필요한 사람이다. 일을 하지 않거나 사회적 활동이 적다면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정보가 없으면 일하기 어렵다. 관계도 중요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정보가 더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 정보를 얻기 위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는 뜻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관계에는 서로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한쪽이 끊임없이 알려줘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결국 지치게 된다.
청각장애인에게 호의를 베풀던 사람도 어느 순간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너를 위해 모든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는 없어. 조금의 배려는 할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야. 스스로 알아갈 수는 없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다려. 알려 줄게.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알아봐.”
내가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번은 남겨두거나 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늦어지더라도 혼자 알아가는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내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 처음은 부탁이다. 두 번째는 요구가 된다. 세 번째는 스스로 한다. 관계가 흔들리지 않고 넘어가면 유지되지만 정보는 잃는다. 대신 사람을 얻는다. 청각장애인에게 이런 교환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을 전제로 살아가고 있다.
시작은 가족이다. 부모, 형제, 자매, 남매는 청각장애인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 이 보호와 배려의 경험은 사회로 나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타인은 ‘남’이라는 사실이다. 가족이 아니다. 가족만큼 친절하지도 마음이 넓지도 이해심이 깊지도 않다. 한 번의 배려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배려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말하지 않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다. 가족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지만, 타인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리고 타인이 먼저 다가오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관계가 시작되고 또 유지된다.
농인은 그들만의 문화가 있고, 건청인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마주할 이유가 적기 때문이다. 설령 마주하더라도 수어 통역사가 함께한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직접 설명해야 한다. 면접을 보는 기분으로 나를 설명하고, 나의 불편함을 말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야 하는 입장이 편하지 않다. 함께 일한다는 것은 타인이 주는 상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 주는 상처 또한 많다. 가족이 나를 위해 희생해 왔듯, 타인도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 우울감이 찾아온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버겁게 느껴질 때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가족은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지만, 타인은 그렇지 않다.
일해야 하는 이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책임은 언제나 내게 먼저 온다. 그 책임은 결국 내 몫이다.
청각장애인은 농인도, 건청인도 아닌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수어를 배워 사용하지만, 농인의 문화에 완전히 속하지도 못하고, 말은 하지만 건청인처럼 자연스럽게 소통하지도 못한다. 그 애매한 경계에 서서 살아간다. 농인과의 관계에서는 화제와 사고방식의 차이로 깊이 스며들기 어렵고, 결국 듣는 역할에 머무르게 된다. 건청인과의 관계에서는 처음에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 속에서 거리감이 생긴다. 그러나 서로를 알아가면 변화가 생기고, 그 이후에야 배려와 친분이 시작된다. 청각장애인은 들리지 않지만 말하고, 수어를 하지만 대화는 쉽지 않다. 그래서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 되기도 한다. 알아가고 싶어 말을 시작하지만, 설명해야 할 일이 되면 오히려 말할 의욕이 사라진다. 싸울 힘이 없기 때문이다. 건청인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을 선택하는 날이 많다. 그 선택이 옳든 그르든 혼자 감당한다. 어쩌면 이것은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청각장애인이 매번 감내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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