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의 소리와의 전쟁] 청각장애인의 사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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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조각이 연결되어 하나의 꽃을 이룸. ©이금자
▲서로 다른 조각이 연결되어 하나의 꽃을 이룸. ©이금자
▲이금자 더인디고 집필위원
▲이금자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이금자 집필위원]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선택한다. 대화하거나 회의할 때 모르는 것을 다시 물어볼지, 아니면 그냥 웃고 넘어갈지 결정해야 한다. 수어는 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소리를 편하게 듣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늘 중간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어디쯤 있는지 잘 모른다.

어느 날 엄마와 대화하던 중 엄마가 물으셨다.
“너 진짜 들리지 않는 거 맞나?” 어이없는 얼굴로 나는 대꾸한다.
“아니, 엄마!!! 내가 들리면 이렇게 살까?”

“하긴 그렇기는 하지만, 몇십 년이 지나도 네가 알아듣는 게 신기해서.”

내 가족도 가끔 나를 의심한다. 내 가족은 내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가끔 혼동한다.

엄마는 헷갈린다고 하신다. 내가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래서 확인하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말보다 눈치로 상황을 먼저 읽는 습관이 생겼다. 나 스스로 검열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 얼마나 불공정한 해석을 요구하는지 나에게만 보이는 지도 같은 것이 생긴 셈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 느낌을 다시 확인하려는 마음이 있다. 가족조차 이러한데, 타인은 오죽할까. 그래서 가끔은 더 빨리 지치는 하루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눈으로 하는 일은 그냥 피곤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농인이 아니다. 수어를 배웠지만 쓸 일이 없어 잘하지 못한다. 대신 말은 매일 하므로 언어는 된다. 농인이 아니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회의에서, 병원에서, 때로는 전화 한 통으로도 그 자리에서 부탁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이마가 찡그려진다.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내가 하고 싶다.’ 그러나 부탁하는 처지에서 그러면 안 되지만,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해진다. 그 자리에서 느끼는 감정은 불편하고 피곤하며 체념이 밀려온다. 부탁을 거두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다.

청각장애인이 사회생활에서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친해지면 알아서 챙겨주겠지.’라는 기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과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친해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상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청각장애인 본인만이 그 문제를 안다. 그 사람도 그 자리가 ‘일’이다. 일이 우선이다. 그 사람을 나쁘다고, 너무하다고 말할 권리도 없다. 그 자리에 청각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잊힌 것이다. 배려가 고맙고, 대신 챙겨주고 말해주는 상황이 반복되면 동등함은 깨지고, 가까운 관계조차 불편해진다. 친구가 아니라 배려의 대상이 되는 순간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친해질수록 불편해지는 이유는 소통의 기본값에 있다. 한 사람에게만 ‘적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이였다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친해지면 달라진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혹시 이것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라고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지만, 친해지면 마음속으로 “또 부탁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부탁하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서로 불편해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요청은 더 개인적인 부담으로 다가오고, 청각장애인은 더 긴장하게 된다. 건청인은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지만, 청각장애인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싫어하지 않을까, 미워하지 않을까 하고 신경 쓰게 된다. 겉으로는 대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대칭이다.

건청인이라고 해서 다 통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을 돌아보면, 들린다고 해서 대화의 맥락을 모두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대화 자체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불편함이 생기면 고쳐가면 된다. 지속 가능한 관계는 이어가면 된다. 자신에게 관대해졌으면 한다. 완벽한 이해를 바라지 말자. 그들도 사람이라 이해받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해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럽다. 불편하지 않은 관계는 서로를 더 이해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과하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친밀함이 그 관계를 만든다.

내가 나의 장애를 말하느냐면 그건 아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내 장애를 말하지 않는다. 대화가 되고 소통도 된다. 언어가 정확하지 않지만 상대 또한 물어오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장애에 대한 공개 여부를 관계의 조건으로 만들지 않고 있다. 먼저 말하지 않는 건 불편하지 않는데 말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물어오지 않는 건 그저 언어가 조금 안 된다는 생각에 서로 암묵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서로가 통하면 된다는 마음이다. 장애는 장벽이 되지 못한다.

청각장애인은 대화할 때 물음표를 한 번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질문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걱정이 따라온다. 질문을 하면서 ‘내가 느린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집중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자존감이 조금씩 깎여 나간다. 그래서 결국 묻지 않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알면 다행이고 모르면 그냥 넘어간다. 아니면 시간이 지나길 기다린다. 세상은 둥글고 던졌던 부메랑은 결국 돌아온다. 질문하려던 답도 늦겠지만 언젠가는 내게 도착한다.

그때쯤이면 이미 소용없는 답이 되어버리지만 그래도 ‘알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나를 위로한다. 이 글을 읽는 장애인 독자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그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 삶의 힘듦을 알고 있다. 뼈가 부러져 이동의 불편함을 느껴보니 공감하게 되었고, 눈이 아파 보니 새삼 보이는 세상이 고마워졌다. 그제야 시각장애인의 불편함이 공감되고 이해되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익숙해져 무뎌졌지만, 장애는 여전히 불편하고 힘들고 서럽다. 다른 사람의 불편함보다 내 불편함이 먼저 다가온다. 나만 힘들고, 나만 서럽고, 나만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은 기분. 그 감정은 누구도 대신 알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아픔이다.

내게 대학생 조카가 있다. 들리지 않는 고모를 평범하게 대한다. 공감하지 못하지만 이해는 한다. 이 아이가 경험해 본 장애인 체험은 시각장애인 체험이다. 청각장애인 고모를 앞에 두고 신나게 시각 체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 청각장애인인 나는 ‘무섭다’였다. 어두운 곳에서 안내하는 사람을 의지해 그냥 가는 것,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그 공간은 공포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모르는 것을 매번 물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침묵하시겠습니까? 생사가 걸린 문제는 아니지만, 살아가는 삶에서는 필요한 질문이다. 지금 전화도 하고, 대화도 하며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들리지 않아 놓치고 지나가는 정보, 소리가 없어서 들을 수 없는 음악. 옆에서 수다 떠는 친구들의 대화, 세상이 조용해서 좋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청각장애인에게는 그 조용함조차 불편일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모르는 부분이 생길 때, 독자들은 매번 다시 물어볼 수 있을까?

[더인디고 THE INDIGO]

청각 장애 퀼트 작가 퀼터스입니다. 수어는 배웠지만 잘 하지 못합니다. 제가 사는 세상은 비장애인 사회입니다 부딪히고 깨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청각장애인의 삶과 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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