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호의 마음가짐] 그게 내 마지막 손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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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종이 위에 펜이 놓여 있다. ©unsplash
▲글을 쓴 종이 위에 펜이 놓여 있다. ©unsplash
최병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최병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최병호 집필위원] 90년 중반에 고등학생이었다. 쌀쌀한 아침이었다.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창가에 비치는 햇볕을 쬐면서 눈을 찡그린 채 몸을 녹이고 있었다. 교실 앞문을 드르륵 열고, 단짝 경민이가 교복 위에 코트를 입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내 옆 의자를 빼서 그대로 앉았다. 그러고 책상에 올려둔 책가방에서 다이어리를 바로 꺼냈다. “새로 산 거야?” 내가 물었다. “자, 여기에 알아서 꾸며줘.” 경민이가 대뜸 다이어리 페이지 한 장을 내밀었다. 당시에 학생들 너도나도 신나게 하던 유행이었다.

다음날, 만화 유유백서의 겐카이를 그려줬다. 주인공 유스케의 스승이던 70대 할머니. 강적을 무찌르기 위해 영력을 끌어올린 미소녀였다. 나도 숨겨진 힘을 꺼내고 싶었다. “오, 멋져!” 경민이는 놀라며 들여다봤다. “야, 어젯밤에 공부 하나도 못 했어.” 나는 농담하면서 으쓱거렸다.

내 방에 밥상을 펴놓고, 가로등 불빛 아래서 라디오로 별이 빛나는 밤을 튼 채 끙끙대며 그렸다. 근육병은 다리와 팔, 손으로 점점 힘을 빼앗고 있었다. 얼굴선이 가장 어려웠다. 서너 번 쓱쓱 지우개질하다가 종이가 찢어질지 몰라서 살짝 찌그러진 채로 두었다. 아쉬움과 후련함에 한숨이 나왔다.

다이어리를 달라고 졸라서 내 그림을 보고 또 봤다. 다시 못 그릴 걸 어렴풋이 느꼈나 보다. 미소녀의 당차고 여유로운 표정과 자세가 또렷이 남았다. 선마다 땀이 배어 있었다. 나중에 그가 기억하는지 물어볼 생각에 두근거리고, 우리가 보낸 계절들이 포개진다.

스케치를 못 하게 된 뒤로 가슴이 시리곤 했다. 그때마다 휘파람을 불었다. 가요 달팽이와 동요 등대지기가 구슬펐다. 원형 벽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가리켰다. 나는 소파와 한 몸이 돼 누웠다. 거실 바닥에 게으른 햇살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입술을 동그랗게 ‘오’ 모양으로 모아 작은 틈을 만들었다. 혀끝을 앞니 가까이 닿을 듯 말 듯 놓고 숨을 내쉬었다. 코로 마신 공기를 조금씩 나눠서 입으로 뱉었다. 입술 모양과 혀끝 위치를 살짝살짝 바꾸면서 음정을 맞췄다. 고개도 못 가누는 내가 몸을 악기 삼아 휘파람을 불었다.

호흡기를 쓰면서 내 섬세한 숨결 휘파람을 잃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늘 해오듯 “후후” 불어 보다가 풀이 죽고 말았다. 마스크를 쓰면 인중이 눌려서 입술을 모을 수 없고, 벗으면 호흡이 약해서 소리 낼 수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허전해져서 입을 모아 본다.

일기를 쓰면서 시름을 잊었는데 연필을 쥐는 손아귀 힘도 하루하루 빠지고 있었다. 물리치료 다녔을 때 담당 선생님께 드릴 성탄절 카드를 떨리는 손으로 쓴 기억이 있다. 나무 책상 위에 노란 등 전기스탠드를 켜 놓고, 루돌프 사슴이 썰매를 끄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폈다. 바짝 앉아서 꾹꾹 눌러썼다. 손목이 뻐근하고 허리가 무거웠다.

그분은 옷매무새를 틈틈이 바로잡아 주고, 내 시시한 말도 잘 받아주었다. 글씨가 못생겨서 실례일지 몰라도 진심은 통할 거라 믿었다. 경민이 다이어리에 그려준 그림을 들여다봤듯 카드에 적힌 글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에는 부들부들, 삐뚤빼뚤 두 마디로 보였지만, 마음에는 말 못 할 상념들이 아른거렸다. 그게 내 마지막 손 글씨였다.

손으로 쓱쓱 그리고, 숨으로 휘휘 불었던 날들에서 멀어졌다. 그럼에도 내게 엄지손가락 힘이 남아 있다. 식탁에 앉아 노트북 터치패드에 손을 올려두고 채팅하는 걸 조카가 지켜봤다. 손가락을 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화면에 글이 써지는 게 신기했는지, “삼촌, 꼭 초능력 같아.”라며 놀랐다. “엄지 끝을 꼼지락거리는 거야.” 우리는 함께 웃었다.

통증과 상실 가운데 살아온 날과 체험한 일들을 문장으로 옮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섬세한 감각과 선명한 장면이 가벼운 몸처럼 휙휙 움직인다. 이제 글쓰기가 내 살가운 손이자 숨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페이스북에 질병과 장애를 겪는 일상과 사유를 나누는 근육장애인입니다.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공존의 영토를 넓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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