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순의 토크백] 따로 또 같이 경계를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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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이고 밀도이며 무게다. ©유금순
▲장애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이고 밀도이며 무게다. ©유금순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 더인디고 집필위원] 지난해 나는 마음만큼 글을 쓰지 못했다. 그 이유는 흔히 말하는 슬럼프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때로는 떠나보내는 시간 속에서 삶이 나보다 성급했기 때문이다.

선천성 유전질환인 클라인펠터 증후군(XXY)을 앓던 지인이 있었다. 그는 당뇨를 함께 앓았고,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선에서 80대 노모와 살아가던 중 당뇨 합병증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게 됐다.

외부 기능 장애를 갖게 되자, 그는 마침내 장애등급을 받았고, 요양병원 입원 과정에서 나는 어쩌다 그의 동료상담사가 되었다.

무릎 아래 절단으로 지체장애 판정을 받았지만, 결과는 경증이었다. 당뇨로 인한 약시가 있었기에 대학병원 안과에서 시력 검사를 받았고, 중복 장애로 중증 판정을 기대했으나, 한쪽 눈이 실명에 가까워도 다른 한쪽이 약시라는 이유로 역시 경증이었다.

타인이 밀어주는 수동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했고, 병원 침대에서 휠체어로 스스로 이승조차 할 수 없었지만, 제도는 그의 삶을 ‘경미하다’로 분류했다.

나는 이따금 병원을 찾아 말벗이 되어주고, 그가 좋아하던 밑반찬과 생필품을 챙겨갔다. 작년 추석 연휴가 끝난 뒤 함께했던 식사가 마지막 만남이었다.

얼마 뒤 그는 음식 섭취가 어려워지고, 구토와 설사, 실어증 증세로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남기고, 12월 초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가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은 그렇게 제도와 삶의 경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떠난 뒤 내게 남은 것은 몇 장의 상담 기록뿐이었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괜찮은 척하던 틈으로 감기 바이러스가 파고들었다.

연말연시 한 달 가까이 기침과 가래,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기침은 수시로 말문과 숨통을 막았고, 폐 깊숙이 들러붙은 가래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체위 변경이 자유롭지 않은 나는 밤마다 새우등으로 몸을 말고, 토악질하며 잠을 설쳤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나아지지 않았고, 검은 비닐봉지와 두루마리 휴지를 곁에 둔 채 선잠과 각성을 반복했다. 나의 밭은기침 소리에 남편도 선잠을 자다가 새벽 담배로 아침을 밝히곤 했다. 입을 틀어막고 싶을 만큼 미안했다.

혹시나 평소 폐 기능 유지를 위해 사용하던 인공호흡기의 부작용인가 싶었고, 마스크 없이 바깥바람을 쐰 게 원인인가 싶었고, 11월부터 활동지원사로 인해 신경 썼던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 감기에 걸렸나 싶어서 아이같이 불안하고 심술이 났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걸 요구하며 떼쓰는 아이처럼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결국 동네 내과에서 전동휠체어에 앉은 채 흉부 엑스레이를 찍었다. 전동휠체어 배낭과 헤드-레스트를 떼고, 스윙 옵션의 팔걸이와 등받이를 제치고, 휠체어에 앉은 채 철판에 몸을 밀착시킨 상태였다. 진단은 폐렴이었다.

의사는 5일간 항생제를 복용한 뒤 호전이 없으면 입원할 것을 권했다. 나는 입원만은 피하고 싶었다. 통합병실 이용이 어려운 최중증 장애인에게 입원은 치료가 아니라 또 다른 부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재촬영 결과는 호전 소견이었다.

25년째 함께 사는 남편은 잠자리를 살피고 체위 변경을 돕고 가습기를 챙겼다. 고맙다는 말을 좀처럼 건네지 않는 내가 무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감정이 말랑말랑하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4년간 함께했던 활동지원사가 작년 추석 연휴가 끝나자 그만두겠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이별 같았지만 사실 예감은 있었다. 함께 있으면서 설명과 해명이 늘어날 때 관계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 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시절인연’이라는 말로 이별을 정리했다.

활동지원서비스는 이용인의 욕구에 기반한 자립생활을 전제로 한다. 활동지원사는 이용인의 선택과 의지를 존중하며 조력하는 역할이어야 한다. 나는 강사로서 그렇게 교육하고 말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용인은 명분상의 소비자이자 늘 쭈뼛대는 선택권자다. 새로운 활동지원사를 구할 때마다 중개기관 코디네이터에게 나의 신체 정보와 원하는 서비스를 브리핑하며 마음 한편이 닳아간다. 하루도 공백이 허용되지 않는 지원 구조 속에서 아쉬운 쪽은 언제나 이용인이다.

30년 공무원 경력의 활동지원사는 “어느 직장이나 예라고만 하는 곳은 없다.”며 자존심을 내세우다 겨우 한 달을 채워 떠났고, 30년 옷 장사를 했던 활동지원사는 9개월이 지나서야 이용인의 욕구에 맞추는 것이 좋은 지원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오십몇 년간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 경력으로 치자면 생활의 달인이다. 근육병이라는 유전성 질환으로 인한 장애니까 사실 엄마 자궁벽에 생명으로 접착됐을 때부터 장애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비장애인으로 오십여 년을 살다 두 달 남짓 장애인의 삶을 살고 떠난 사람과 평생 장애와 함께 살아온 나의 삶은 같은 ‘장애’라는 말로 묶일 수 없다.

장애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이고 밀도이며 무게다. 장애는 개인의 역사이다. 우리는 따로 또 같이 경계를 살아간다. 그러나 제도는 여전히 그 ‘따로’의 시간을 헤아리지 못한 채 삶을 단순한 기준표로만 재단하고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장애인권강사, 동료상담 및 사례상담가로 활동하였으며 2019년 대전 무장애 관광 가이드북(무장애대전여행)을 발간(5인 공저)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이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소속 직장내장애인인식개선교육과 활동지원사 및 근로지원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 실제 교육과 보수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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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나의 삶 자체이며 역사다.

공감에 감사합니다.

장애는 개인의 역사라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기다렸던 글 잘 읽었습니다. 왕성한 활동 응원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격려와 응원에 힘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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