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필의 모두까기] 피해자를 법정에서 지우는 것이 최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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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홍보동영상 유튜브 화면 캡처
▲헌법재판소 홍보동영상 화면 일부. ‘헌법은 국민을 위하여 존재합니다’라는 자막이 적혀있다.

“2026년 3월 26일 헌재 ‘합헌’ 결정 그 너머를 묻다”

[더인디고 = 무필 집핍위원]

합헌이라는 결론, 그러나 갈라진 판단

2026년 3월 26일, 헌법재판소는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 진술을 피고인의 반대신문 없이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옛 성폭력처벌특례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재판관 5인이 위헌 의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위헌 정족수 6인에 미달해 내려진 이번 결정은, 장애인 피해자의 ‘2차 피해 방지’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두 헌법적 가치가 얼마나 첨예하게 충돌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헌법적 판단의 일관성 문제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2021년, 같은 조항 중 ‘19세 미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반대신문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유사한 구조의 규정에 대해 이번에는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헌법 해석이 고정된 결론이 아니라 재판관 구성과 가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번 결정은 동일한 헌법 원칙도 재판관 구성과 해석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반대신문권, 공정한 재판의 핵심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단순히 증거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증인을 직접 신문하며 진술의 신빙성을 다툴 수 있는 ‘반대신문권’은 공정한 재판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영상 진술이 수사기관의 질문과 피해자의 일방적 진술로 구성된 전문증거라는 점에서, 그 형성 과정과 맥락을 충분히 검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반대신문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됐다.

보호라는 이름의 딜레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정을 마주하며 복잡한 소회를 금할 수 없다. 법정이라는 위압적인 공간, 그리고 대면 반대신문 과정에서의 압박이 장애인 피해자에게 심리적 고통과 기억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은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일정 부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 결정이 정당한지의 문제를 넘어, 우리는 어떤 재판 구조를 지향해야 하는지로 질문을 확장해야 한다. 피해자를 법정에 세우지 않는 방식, 다시 말해 피해자를 ‘보이지 않게 하는 보호’가 과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선의 권리 보장 방식인가.

보호가 배제가 될 때

그동안 우리 사법 시스템은 장애인 피해자를 권리의 주체라기보다 ‘보호의 대상’으로 치부해 온 측면이 있다. 피해자가 법정에 출석하지 않아도 재판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는 배려로 기능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장애인이 반대신문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전제를 강화하며 그들을 절차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보호가 참여의 기회를 대체하는 순간, 권리는 쉽게 축소된다.

배리어 프리 법정으로의 전환

이제는 ‘영상 뒤에 숨는 보호’를 넘어,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로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보조 장치의 확대를 넘어 사법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선, 이른바 ‘배리어 프리(Barrier-free) 법정’을 실질화해야 한다. 이는 물리적 접근성 개선을 넘어 장애 특성에 맞는 쉬운 언어로 질문을 재구성하고, 질문을 사전에 제공하거나 반복·유도 질문을 제한하며, 충분한 답변 시간을 보장하는 등 재판 운영 전반에 걸친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장애 유형별 의사소통 방식에 대한 표준화된 가이드라인 역시 필요하다.

또한 진술조력인의 역할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조력인은 중립적 ‘중재자’라기보다, 피해자의 의사와 표현이 왜곡 없이 재판부에 전달되도록 돕는 전문적인 의사소통 지원자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 이해에 기반한 전문성 강화와 함께, 절차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가 병행되어야 한다.

증거의 신빙성과 절차적 보완

아울러 영상 진술을 증거로 활용할 경우, 그 형성 과정과 신빙성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남는다. 반대신문이 제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판단은 상급심에서 다시 다투어질 가능성이 높고, 이는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또 다른 불확실성과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진술이 강압이나 유도 없이 이루어졌는지, 장애 특성이 충분히 고려된 환경에서 수집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적 보완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지우고 있는가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는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영상 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피해를 직접 말하고 정의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 사법 절차의 주체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단순한 합헌 여부를 넘어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일한 헌법 원칙도 재판관 구성과 해석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절차에 의존해 피해자를 보호하는 방식은 언제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오늘은 보호 장치로 기능하던 제도가, 내일은 위헌으로 판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특정한 예외나 우회적 방식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판단 구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재판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피해자가 법정에 서지 않아도 되는 재판이 아니라, 서더라도 안전하고 존중받으며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재판, 즉 ‘배리어 프리 법정’이 그 대안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있는가, 아니면 법정에서 지우고 있는가.
이제 국가는 ‘출석하지 않아도 되는 재판’을 넘어, ‘출석해도 안전한 재판’을 설계해야 한다. 인권은 배제가 아니라, 참여를 통해 완성된다.

[더인디고 THE INDIGO]

mercy_jc@hanmail.net'
공자의 자절사 중 무필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결론을 미리 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필명 무필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드러난 문제를 그대로 비판하겠다는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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