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이금자 집필위원] ‘청각장애인은 아무 소리도 못 듣는다’는 오해가 있다. 모든 청각장애인이 완전히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아니다. 정도와 유형이 다양하다. 나와 같이 아예 못 듣는 사람도 있는 반면, 큰 소리로 말하면 듣는 사람도 있다. 보청기나 인공와우, 수술로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소리를 인식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크다. 경보와 마라톤의 차이다. 미세하게나마 들리는 사람은 더디나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이 차이가 생활에서 많은 결과를 가져온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달려가는 사람도 있다. 이 차이를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의 속도는 서로 다르다. 같은 ‘청각장애’라는 이름 아래 있지만, 각자가 마주하는 현실은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쉽게 단정짓기보다, 그 차이와 삶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청각장애를 완전한 ‘무음 상태’로만 생각한다. 청각장애에도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어쩌면 이런 오해는 충분하지 않은 정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뇌수막염으로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는가 하면, 관련 질환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노화로 인한 경우는 여기서 제외된다. 우리가 흔히 ‘청각장애인’이라고 부르는 말은 어쩐지 젊은 사람에게 붙는 수식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노화로 인해 들리지 않는 경우를 청각장애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으니까. 그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변화처럼 받아들인다.
‘청각장애인은 말을 못한다’는 오해도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청각장애인은 많다. 청각장애는 후천적으로 들리지 않게 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이미 언어를 습득한 뒤에 소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질병이나 사고로 청각에 장애가 생긴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렇기에 말은 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는 조금씩 변한다. 후천적으로 찾아온 청각장애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이미 배운 말로 의사소통을 이어갈 수 있다.
언어는 소리를 통해 유지되고 다듬어지는 것이기에,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천천히 조금씩 언어장애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조금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나 어릴 때부터 언어교육을 받은 청각장애인은 보조기기를 사용하면 말하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 후천적 장애와 교육의 영향으로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청각장애인은 자신의 방식으로 말하고 의사소통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교통사고로 불편해진 몸을 물리치료로 회복하듯 청각장애인도 언어를 위해 꾸준히 언어교정을 해야 한다. 들리지 않음을 극복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다.
단순한 연결이 청각장애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기도 한다. 또 하나의 오해는 수어를 배워 수어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모든 청각장애인의 모습으로 일반화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구어를 연습한 청각장애인은 수어를 함께 배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된 후 청각장애인가 생긴 사람과는 상황도 다르다. 성인이 되어 청각에 장애가 온 사람에게 수어는 선택이 될 수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구어를 배우는 청각장애인에게는 수어를 함께 배우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배우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언어 발달을 위해 수어를 배우지 않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청각장애인이라 해도, 어떤 언어를 배우고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지는 각자의 환경과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청각장애인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오해도 있다. 들리지 않기 때문에 대화에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말의 뜻을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처 듣지 못해 대답이 늦어질 뿐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을 도울 수 있는 기술도 많아졌다. 번역 앱이나 자막 기술도 계속 발전하고 있고 이런 변화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가톨릭 예비 신부들에게는 신부가 되기 위해 배우는 수업이 하나 더 있다. 라틴어를 배우듯 수어를 배우는 것이다. 한국에는 농인 신부가 두 분 계시는데, 건청인 예비 신부들이 수어를 배우며 소통의 방법을 함께 익히고 있다. 농인 신부가 언어를 배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예비 가톨릭 신부들은 다름을 받아들이고 함께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로의 언어를 알고 이해하려 한다면, 의사소통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수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았고, 그 방식에 대한 경험 부족이 서로의 다름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청각장애인은 수어를 하지 않아도 소통은 가능하다. 모두가 농인은 아니다. 들리지 않을 뿐, 사고와 생각은 건청인과 다르지 않다. 대답이 늦어지는 것도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들리지 않게 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은 들렸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하고, 청각장애인 스스로 이전과는 다른 삶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들리던 때의 삶과 들리지 않게 된 삶은 마치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 두 삶 사이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은 때로 깊은 고립감과 투명함이다. 혼자가 아닌데도 혼자인 것 같은 마음,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감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청각장애인의 개인차를 알지 못한 채 대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 건청인들이 각자의 능력과 차이를 가지고 살아가듯, 청각장애인 또한 그렇다. 들을 수 있든 없든 사람마다 행동과 언어의 방식이 다르고, 그 차이는 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함께 보여준다.
들리지 않지만, 노력과 배움을 통해 스스로 일으켜 세우며 살아가는 청각장애인들은 많다. ‘들리지 않는다’ 는 하나의 기준만으로 청각장애인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청각장애인과의 의사소통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서로의 경험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건청인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서로의 언어와 방식을 알아간다면, 생각보다 더 많은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청각장애인이 먼저 손을 내밀기에는, 겪어온 경험의 아픔을 추스르고 다시 나서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젊은 시절보다 지금의 장애인들은 더 나은 제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용감하다. 제도를 믿고 자신을 믿는다면 혼자서도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기술, 그리고 용기와 모험은 이전 세대가 쉽게 가지지 못했던 것이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정보에 접근하기도 어려웠고 교육의 기회도 많지 않았다. 배우지 못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나 설명도 부족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장애를 능력의 부족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과도 마주해야 했다. 그 경험에서 오는 삶의 고통은 분명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은 때로 넘어졌던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힘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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