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인디고=이금자 집필위원]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나의 삶에서 나온 경험이자 체험이다. 다른 청각장애인의 생각이나 생활과는 같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의 생각에서는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지어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진실이다. 나는 태어난 그대로 주어진 환경 속에서 변화 없이 자랐다. 건청인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나의 생활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 생활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인내한 끝에 이어져 왔다. 청각장애인에게는 금단의 영역과도 같은 건청인들의 세계에서 도움 없이 홀로 걸어 살아남아 지금은 퀼트 작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외로운 길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소리가 중요하지 않다. 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도 느끼지 못한다. 들리면 말을 배워가고 들리지 않으면 말을 잃어간다. 그렇게 10대가 되어서야 자신을 알게 된다. 문득 잊고 있었던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초반, 그때 한 사람을 만났다. 비슷한 나이의 여자. 그러나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말들을 옮긴다. 나는 아홉 살에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녀는 열다섯 살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수어를 하지만 나는 하지 않는다. 그 하나의 차이로 언어와 행동, 그리고 문화까지 달라졌다. 그녀는 말을 잃어갔다. 언어를 연습한 것이 아니라 수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구어보다 수어에 더 집중하면서 말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들리지 않게 되면서, 말하지 않으면 언어장애는 빠르게 찾아온다. 왜냐하면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 입도 함께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청각장애인이 언어 연습을 하지 않으면, 짧은 시간 안에 찾아오는 언어장애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이다. 그녀는 수어를 배우면서 어쩌면 더 빠르게 그 길로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수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농인이 아닌 청각장애인이 수어를 배우며 구어가 사라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수어를 배우고 있다면 언어 연습도 함께 하면 좋겠다. 나와 달리 그녀는 듣지 못한 시간이 짧았지만, 말의 언어보다 수어를 먼저 배우며 자신의 처지를 빠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나는 청각장애인이니 수어를 배워야 해.” 그런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아온 결과가 지금의 나다.
얼마 전 내가 사는 동네에서 늦은 밤 한바탕 큰 소란이 있었다. 나는 전쟁이 난 줄 알았다.
심장이 뛰었다. 집집마다의 옥상에는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던 군인 같은 실루엣들이 아주 강한 빛을, 온 동네에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느질하느라 고개 숙이고 있던 나는 알 턱이 없었다. 청각장애인이니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소란을 먼저 알게 된 것은 내가 키우는 고양이였다. 바로 옆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에 집중하며 고개를 움직이던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강한 불빛이 온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소방대원들이었다. 들리지 않아서 몰랐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 골목길마다 늘어서 있던 대형차들, 소방차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이 상황을 고양이로 인해 알게 된 것이다. 먼저 발견해서 날뛰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불이 난 곳이 내가 사는 집 내 이웃이 아니었어도 대피하라는 소리도 못 듣고 꼼짝없이 집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소란이 잠잠해지고 제자리로 돌아간 뒤에 내게 밀려오는 것은 공허한 우울감이다. ‘그래, 나는 청각장애인이었지’ 하는 마음이 먼저 다가와서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으로도 연결된다. 온 동네가 전쟁 난 듯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도, 돌아보라고 아우성쳐도 누군가가 찾아와 앞에서 말해주지 않는다면 알 방법은 없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세상, 조용해서 좋다고 말하지만 시끄러워도 좋으니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나의 마음이자 청각장애인의 마음이다. 늘 조심하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하루의 삶도 돌발상황 앞에서는 지나가 버린 밤처럼 무용지물이 되고는 한다. 길을 걸어가면서 뒤돌아보는 것이 버릇이지만 어느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반갑다고 툭 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소리와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방송이나 영상으로 접하는 정보는 미리 숙지된 것이어서 큰 불편함이 없다. 준비 없이 갑자기 마주치는 상황이 힘들다.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숨고 싶어지기도 하며, 가던 길 돌아가고 싶고,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 마음은 같은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은 쉽게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청각장애인은 눈으로 모든 것을 알아가야 하는 장애다. 농인은 수어 하나만을 보고 건청인은 무심한 듯 귀로 흘려 듣지만 청각장애인은 온 신경의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눈 하나로 다한다. 들어야 하고 판단해야 하고 말해야 하는 장애,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은 늘 피곤하고 힘들다. 신체 하나의 에너지를 단시간에 소비해서다. 잠이 많아 게으른 것이 아니라, 온몸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결과가 잠으로 오는 것이다. 방전된 것처럼 바닥에 쓰러지면 그대로 잠에 빠진다. 곤두섰던 두뇌의 긴장이 풀리면서 잠으로 빠져든다.
나의 결혼생활에서 드러난 나의 잠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남편은 많이 아팠다. 위암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지쳐가던 때였다. 30대의 젊은 나이지만 환자를 간병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다크서클은 눈 밑까지 내려와 멍든 것처럼 까맸고 몸은 점점 말라갔다. 잠을 못 잤더니 어디에 있는지조차 감각이 없었다.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우울한 기분을 느껴본 사람은 안다. 힘든 몸 때문에 집에 있는 날은 남편을 돌보는 것 외에는 잠만 잤다. 그런 나를 늘 불만스러워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엄마는 내게 이런 말을 전했다.
“황 서방이 엄마에게 전화했어.”
“응! 뭐라고 그러는데?”
“네가 게을러서 잠만 잔다고 하더라. 그래서 엄마가 말했지. 금자는 8시간에서 9시간은 자야 하는 애라고, 잠을 못 자면 자주 아프고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역시 엄마는 엄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환자랑 살면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 엄마! 게으르긴 뭐가 게으르다고. 원하는 거 다 해주고,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있는데…” 그 후 남편도 내게 말했다.
“장모님이 그랬어, 당신 잠자면 깨우지 말라고, 그래서 안 깨웠어.”
이 이야기를 듣고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자고 있으면 밥시간이 지나도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깨우느라 바빴던 사람이었다.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 깨우지 않는지를. 청각장애인의 게으름이라 생각하는 잠은 게으름이 아니라 에너지를 모으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어떡해서든 마무리하는 사람 또한 청각장애인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다. 알면 그 누구보다 잘해 내는 사람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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