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시각장애인은 안대 쓴 비시각장애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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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목적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다. ©unsplash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목적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다. ©unsplash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의학계와 스포츠계에서 쓰이는 구호 중 ‘여성은 작은 남성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인권은 전에 비해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으로 설계된 의료와 스포츠 시스템으로 인해 잘못된 치료 방법이나 부상의 위험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여성의 신체에 맞는 맞춤형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여성과 남성은 인간이라는 공통성이 있지만, 해부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작은 크기의 남성 옷을 여성에게 입히거나 남성 영양제의 복용량을 줄여서 여성에게 투여하는 것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사고라는 것이다.

힘을 독점하고 있던 남성들에 의해 설계된 약자성을 가진 여성에 대한 몰이해적 디자인은 그 단어를 조금 바꾸어 시각장애인에 대입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문장이 된다.

“시각장애인은 안대 쓴 비시각장애인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에 대해 생각할 때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다 보면 갑자기 안대가 씌워진 비시각장애인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가 가진 감각 중 90% 이상을 시각 자극에 의지하던 다수의 사람에게 갑자기 보이지 않는 상태를 대입한다면 극단적으로 무력한 존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짧은 거리조차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방법도 막막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상상 속의 그런 존재들을 위해 설계된 시각장애인 대상의 정책이나 배려는 시각장애인과는 어울리지도, 적합하지도 않다.

갑자기 안대를 착용한 비시각장애인과 달리 나는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이동해야 할 방향을 정하고 장애물을 피해 목적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다. 이런 나를 만나는 다수의 사람은 부축을 시도하거나 필요 이상의 안타까움을 표현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비시각장애인 중심의 사고일 뿐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규정을 준수한 점자블록이나 버스 정류장에 정확히 정차하는 버스, 그리고 번호판을 읽어주는 새로운 기술이지만 그런 것들은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나와 처음 식당을 방문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빼곡하게 적힌 메뉴판의 글씨를 어떻게 다 읽어줄까를 고민하거나 여러 가지 반찬을 작은 앞접시에 모두 덜어줄 방법을 계산하지만 내게 그런 것은 최우선의 어려움이 아니다.

특별히 새로 방문하게 된 제3세계 국가의 음식점이 아니라면 중국집이나 한식집에 어떤 메뉴가 있는지는 대체로 알고 있고 반찬 정도의 위치는 한 번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품위 있는 식사를 보장할 수 있다. 그보다는 키오스크가 빼앗아 가 버린 나의 정보접근성을 되찾아 오는 문제나 계산대를 찾지 않아도 애플리케이션 등을 이용해서 메뉴를 스스로 고르고 계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 정도가 내가 원하는 우선적 조치이다.

어떤 은행 직원은 내 입출금통장의 잔액을 보고 장애인의 살림살이를 걱정했지만, 나의 어려움은 그보다는 자필 작성만을 고집하는 은행의 고객 문서 작성 방법에 있었고 얼마만큼의 할인이 적절한지를 물어오는 박물관 담당자의 물음엔 할인은 해 주지 않아도 되니 전시물을 감상할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말했다.

여성에겐 여성에게 맞는 옷과 의료법과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것은 남성으로만 살아온 이들의 것을 작게 만들어서 나눠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의 처지에서 생각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의 삶은 갑자기 안대가 씌워진 시력 좋은 사람들의 상태가 아니다. 나는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내게 적합한 매체가 주어지면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고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 내게 필요한 시스템 또한 안대 쓴 비시각장애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가 없다. 시각장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각장애인은 안대 쓴 비시각장애인이 아니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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