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디고 = 무필 집필위원]
입법권의 빛과 그림자: ‘자유로운 발의’와 ‘무책임한 방치’
대한민국 국회에서 의원은 소속 상임위원회와 관계없이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입법권을 폭넓게 보장하는 이 제도는 민주주의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장애인 정책에 있어 이 제도는 점점 ‘희망 고문’으로 변질되고 있다. 발의는 자유롭지만, 그 법안을 끝까지 책임지는 주체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 의원들은 자신의 상임위를 넘어 타 상임위 소관 법안도 수십 건씩 발의해왔다. 예컨대, 서미화, 최보윤, 김예지 의원 역시 이동권, 정보접근권, 노동권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수의 타 상임위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그 수많은 법안 중 과연 몇 건이나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상정되어 단 한 차례라도 제대로 논의되었는가. 발의의 ‘실적’은 의원 개인의 몫이 되지만, 이후의 ‘방치’는 고스란히 장애인의 몫으로 남는다. 이 구조는 입법이 아니라 기만에 가깝다.
‘실적 쌓기’와 ‘면피’ 사이, 유령이 된 장애인 법안들
22대 국회에서 장애인 당사자 의원은 4명에 불과하다. 그중 3명이 보건복지위원회에 집중된 구조는 장애인 정책을 여전히 ‘복지’라는 틀에 가두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동권은 국토교통위원회, 교육권은 교육위원회, 노동권은 환경노동위원회 소관이다. 장애인의 삶은 이미 복지의 범위를 넘어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있음에도 국회는 여전히 상임위 경계 안에 권리를 가둬두고 있다.
그 결과, 타 상임위로 넘어간 장애인 법안들은 사실상 ‘주인 없는 법안’이 된다. 해당 상임위 의원들에게는 우선순위가 아니고, 발의 의원은 소속 상임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 그렇게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계류되다가 임기 만료와 함께 사라진다.
더 문제인 것은,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타 상임위 법안 발의가 ‘실적 쌓기’나 ‘입법 면피’의 수단으로 기능할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발의했다는 사실만 남고, 심사와 통과에 대한 책임은 사라진다. 국회 안에서 장애인 법안이 ‘유령’이 되어가는 이유다.
정당의 ‘책임 정치’, 이제는 시스템이 답해야 한다
이 문제는 더 이상 개별 의원의 성실성이나 의지로 해결될 수 없다. 구조적 문제는 구조로 풀어야 한다. 해답은 정당에 있다.
첫째, 각 정당은 상임위원회별로 장애인 정책을 전담할 ‘책임 의원’을 지정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니다. 해당 상임위에 회부된 장애인 관련 법안이 최소 한 차례 이상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논의되도록 보장하는 ‘장애인정책(복지) 대표의원’을 두는 것이다. “우리 상임위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정당 차원의 강제력이 필요하다.
둘째, 국회법 제63조에 따른 연석회의를 실질적으로 가동해야 한다. 이미 제도는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연석회의는 극히 예외적으로만 열리는, 사실상 사문화된 장치에 가깝다. 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처럼 다부처·다상임위가 얽힌 문제를 단일 상임위에 맡겨두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 회피에 가깝다.
연석회의를 정례화하지 않는 한, 국회는 계속해서 “소관이 아니다”라는 말로 장애인의 권리를 미루게 될 것이다.
‘입법의 염치’를 회복하는 국회를 기대하며
논의되지 않는 법안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 법안이 담고 있는 장애인의 삶이 국회에서 부정되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 국회에 필요한 것은 발의 건수라는 숫자가 아니라, 단 하나의 법안이라도 끝까지 책임지고 심사대에 올리는 태도다. 입법은 이벤트가 아니라 과정이며, 책임이다. 장애인의 삶은 정치적 실적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정당이 책임을 나누지 않는 한, 장애인 입법은 앞으로도 방치될 것이다. 이제 답해야 한다.
발의만 하는 국회인가, 끝까지 책임지는 국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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