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63회 법의 날,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따른 국내법의 조화로운 개정을 바란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이 국내에서 비준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다수 법률은 협약 기준과 충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에 2023년 12월 출범한 ‘CRPD 국내법 개정 연대’는 규범 반영 지표를 마련하고, 상충 법률의 제·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연대는 39개 법률을 분석·검토해 16건의 개정안을 발의했으며, 모자보건법, 상법, 최저임금법 등 주요 쟁점 법률을 중심으로 사회적 논의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장애인권리협약 채택 20주년을 맞아, 연대는 릴레이 기고를 통해 협약의 국내 적용 필요성과 향후 과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ㅣ김홍기 서리풀서초장애인자립생활센터 국장

법은 누구를 위해, 그리고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가
제63회 ‘법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법의 날’은 국민의 준법정신을 앙양하고 법의 존엄성을 되새기기 위해 제정된 국가 기념일입니다. 1963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법의 지배를 통한 세계 평화대회’에서 모든 국가에 ‘법의 날’ 제정을 권고하기로 결의한 후 우리나라도 이듬해인 1964년부터 법무부 주관으로 ‘법의 날’을 기념해 오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1919년 4월 11일 일제 강점기 중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통해 처음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로 명시한 바 있습니다. 이틀 후인 1919년 4월 13일에 공표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은 총 10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제3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선언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역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법은 우리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2026년 4월, 장애인의 날 몇일 후 ‘법의 날’에 우리는 묻습니다.
‘법은 장애인에게도 평등한가?’
법의 존엄성 뒤에 숨겨진 차별적 조항들이 여전히 장애인의 삶을 외면하거나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가를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2008년,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한 후 2022년 ‘선택 의정서’까지 채택하며, 국제사회에 장애 인권 증진을 천명한 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국내법들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정신과 원칙에 위배되거나 충돌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흠결을 품은 채 기능하고 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서도 명백히 밝혔듯 대한민국의 국민은 일체 평등해야 합니다. 제63회 ‘법의 날’이 장애인을 배제하거나 차별하고 있는 법과 제도들에 대해 되짚어 보고, 이를 개선해 나가는 시작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국내에서 유명무실한 국제 기준
미국, 정확히 이야기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그 수반들에 의해 국제법이 무력화되는 안타까운 시국이지만, 원칙적으로 대한민국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비준국으로서 국내법을 협약의 내용에 맞추어 개정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엔장애인권리협약 국내법 개정 연대’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법에는 여전히 장애를 이유로 권리를 제한하는 독소 조항들이 존재합니다.
첫째, 장애인의 생명권과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법률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는 장애를 결함으로 간주하고 장애인의 출산을 국가가 통제하려는 우생학적 관점의 잔재입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23조(가정 및 가족에 대한 존중)’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자신의 자녀 수를 결정하고 출산할 권리를 보장할 것을 명시하고 있으나, 우리 법은 여전히 장애인의 생명권과 자기 결정권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장애인의 경제적 자립을 가로막는 법적 장벽이 견고합니다.
‘최저임금법 제7조(최저임금의 적용 제외)’는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 능력이 현저히 낮은 자에 대해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이라는 보편적 노동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며, 장애인의 노동을 저평가하는 법적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27조(근로 및 고용)’에서 강조하는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에서의 노동권은 ‘최저임금법 제7조(최저임금의 적용 제외)’ 조항 앞에 무력화되고 있습니다.
셋째, 장애인의 사회 참여와 접근성을 제한하는 낡은 규정들이 산재합니다.
장애분리 통계의 부재를 정당화하는 ‘통계법’, 장애를 이유로 입국을 금지할 수 있는 ‘출입국관리법’, 15세 미만이나 심신상실자의 사망보험 가입을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상법’ 등 무수한 법 조항들에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차별적 시각이 반영된 채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와 정부를 향한 외침
장애계에서는 끊임없이 법률 개정을 요구해 왔습니다. 2024년 이후 ‘유엔장애인권리협약 국내법 개정 연대’는 39개 이상의 법률을 분석하고, 총 16건의 법률 개정안을 건의하여 국회에서 개정 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은 법안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이에 대해 법률을 심사하는 각 상임위원회나 관계 부처에서는 행정적 부담, 예산 부족, 다른 법과의 상충, 반대의견 등의 이유를 들어 돌려막기식 책임회피를 반복해 왔습니다.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한 ‘사법 접근권 보장 요구’에는 인력 고용의 부담을 이유로 반대하고, ‘공직선거법 개정을 통한 참정권 보장 요구’에 대해서는 비용 부담과 장소 확보의 한계를 핑계 삼으며, ‘통계법 개정’에 대해서는 비효율을 논합니다.
식민 지배를 당하고 전쟁을 겪었던 나라 중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여,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국제법적 규범과 질서를 당당히 요구하는 지금 시대의 대한민국이, 정작 장애인의 권리에 관해서는 국제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현실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크게 외칩니다. 그리고 요구합니다.
국회는 계류 중인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조화 법안’을 즉각 처리해야 합니다.
‘출입국관리법’, ‘치료감호법’, ‘통계법’, ‘형사소송법’ 등 이미 발의된 16개 법안은 장애인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자 최우선 과제입니다.
정부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이행을 위한 국가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합니다.
유엔장애인 권리위원회는 2022년 최종 견해를 통해 장애인식 개선을 위한 국가 전략 채택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교육 이수율에 기반한 단순 정량평가에 그치지 말고, 모든 공공 영역과 사법체계 내에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정신이 발현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고 효과적인 전략의 이행을 위한 인력과 예산을 지원해야 합니다.
장애인권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민관 합동 법률 모니터링 체계를 가동해야 합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국내법 개정 연대’를 비롯한 장애계에서는 2026년에도 지속적으로 장애 관련 국내법을 모니터링하여, 유엔 위원들이 권고한 ‘시민사회 최종 견해’를 바탕으로 법률 개정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활동을 민간 활동으로 치부하지 말고, 활동 과정에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게 참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 비하와 차별을 일삼는 일부 정치인들을 비롯한 무리들에 대해 실효성 있는 제재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윤리실천 규범을 시작으로 비하와 혐오 표현에 관한 규정과 법률을 신설하여, 엄격히 책임을 묻는 제도를 확립해야 합니다.
법률주의에서 법치주의로
법은 고정불변의 규칙이 아니라 시대의 공론과 사회, 환경, 역사적 배경 그리고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변화하는 상대적 기준입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이행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법률이 현시대의 가치와 기준에 사맞디 아니하다면, 개정되어야 하는 것이 법이며 그렇게 작동하는 국가가 진정한 법치주의 국가입니다.
기존의 법 조항에 갇혀 인간의 존엄한 기본권을 침해하고 나아가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한다면, 대한민국은 법치주의가 아니라 법률주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이 어떠한 이유에서도 차별받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제63회 법의 날’을 맞이하여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못 본척하는 일부 법률가와 정치인 그리고 우리 사회를 향해, 1919년 일제에 항거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한 독립 투사들의 염원이 담긴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3조’를 외쳐봅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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