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필의 모두까기] 상식이 정책이 되는 시대의 씁쓸한 자화상

26
▲상식의 복지/ 이미지=챗지피티
▲상식의 복지/ 이미지=챗지피티

[더인디고 = 무필 집필위원] 정부가 최근 발표한 ‘위기가구 지원을 위한 복지안전매트 강화 방안’을 관통하는 핵심은 ‘신청주의’라는 해묵은 관행과의 결별이다. 신청하지 않아도 국가가 먼저 찾아가 돕겠다는 ‘적극적 복지’로의 전면적인 전환은, 사실 진작에 실현되었어야 할 당연한 약속이다. 특히 발달장애인 가구나 미성년자 등 위기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동의 없이도 생계급여를 직권 신청·지급하겠다는 대목은 고무적이다. 국가가 더 이상 서류 뒤에 숨지 않고 스스로 문턱을 허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반가운 소식을 접하며 마음 한구석이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당연히 보장됐어야 할 생존권이 ‘상식’으로 구현되기까지 너무 많은 이들의 희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서류와 신청 절차 앞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남겨진 채 삶이 무너졌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이제야 도착한 이 상식 앞에서 고마움보다 미안함과 서글픔이 먼저 든다.

특히 이번 대책이 추진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느끼는 또 다른 씁쓸함은, 결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있어야만 행정의 요지부동이 깨진다는 현실이다. 그동안 현장과 시민사회에서 수없이 외쳐온 절규에는 “예산이 없다”,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선을 긋던 행정이 통치권자의 의지 하나에 이토록 기민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역설적이다. 결국 막혀 있었던 것은 길이나 예산이 아니라, 행정의 우선순위와 의지였음을 이번 사태는 증명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지속 가능한가이다. 공무원 조직은 구조적으로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흔히 ‘무사안일’이라 비판받지만, 그 이면에는 규정 밖의 적극 행정에 따르는 감사와 책임 추궁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몇 년마다 자리를 옮기는 순환보직 시스템과 정량적 성과에 매몰된 평가 체계는 현장의 공무원들을 사람보다 서류에 몰두하게 만든다.

결국 이번 정책이 일회성 발표나 정권의 성과 과시로 끝나지 않으려면 행정의 관성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통치권자의 지시에만 일시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상식을 따르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직권 신청과 적극 행정에 대한 실질적인 면책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고, ‘얼마나 많이 발굴했는가’보다 ‘얼마나 인간다운 삶으로 연결했는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도입되어야 한다.

상식이 정책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장애’라는 이유로 선택권을 박탈당하거나,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한 책임을 강요받는 등 수많은 비상식이 상식의 탈을 쓰고 숨어 있다. 우리는 이 ‘상식적인 행정’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지 감시함과 동시에, 아직 도처에 널린 비상식들을 찾아내 상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상식적인 일에조차 감사해야 하는 씁쓸한 시대를 넘어, 국가의 돌봄이 누군가의 결단이 아닌 공기처럼 당연한 권리가 되는 사회로 나아가길 바란다.

[더인디고 THE INDIGO]

▶관련 기사

“신청 안 해도 복지 연결”… 정부, ‘적극적 복지’ 전환 선언

mercy_jc@hanmail.net'
공자의 자절사 중 무필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결론을 미리 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필명 무필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드러난 문제를 그대로 비판하겠다는 다짐입니다.

0 Comments
Langu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