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순의 토크백] 썼다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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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오늘도 데구루루 /이미지=제미나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오늘도 데구루루 /이미지=제미나이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더인디고 집필위원

[유금순 = 더인디고 집필위원] ‘광역의원 비례대표’. 지난 두어 달간 내 마음을 가장 뜨겁게, 또 가장 힘들게 했던 단어였다.

당 지역위원회 장애인위원장으로서 동구 구석구석의 사람들과 섞였고, 국회의원 재선 캠프에서 나름 열심히 선거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총선을 대비한 국회의원 선거사무실의 2cm 이상 단차에 이동식 경사로의 필요성을 알렸고, 턱이 있는지 없는지 개의치 않던 상무위원들이 저녁 회식 식당을 정할 때 휠체어 출입이 가능한 곳인지를 살피게 되는 영향력을 끼쳤다. 그들은 배려라고 생각했을 테고, 나는 권리라고 여겼다.

내게 정치는 거창한 명예욕이 아니다. 휠체어를 탄 채 출입할 수 없는 식당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자, 이동권이 생존권과 직결되는 이들의 삶을 제도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과정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휠체어로 구르며 차별에 맞서 살아야 했던 나는 정치가 힘 있는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보았고, 그렇기에 더욱 ‘우리’라고 명명하는 모두의 일상이 정치적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서류 더미 속에서 마주한 현실은 차가웠다. ‘정부24’에서 답을 구하지 못해 관할 경찰서를 찾아 ‘공직후보자 범죄경력회보서’를 떼고, 행정복지센터로 뛰어다녔다. 지방법원등기국에서는 무소유의 가벼움에 되레 낯부끄러움을 맛보고, 왠지 모를 씁쓸함도 경험했다.

중증장애를 안고 사는 내게, 선거 비용이라는 현실의 벽은 더없이 높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망설이게 한 것은 ‘출마를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었다. 의정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간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을 통해 유지해오던 최소한의 삶, 즉 활동지원서비스나 장애 비용에 따른 보조금, 의료지원 등 나를 지탱하던 안전망을 상당 부분 내려놓아야 했다. 정치를 하려다 당장 나의 생존권이 위협받아야 하는 이 기묘하고도 가혹한 모순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내 생애 이번만큼 조석으로 온도 차가 다른 갈등에 시달려보긴 처음이었다. 고백컨대 결혼 전 함께할 배우자와의 미래도 이만큼 고민해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주변의 권유는 따뜻했다.

“기초의원 비례대표부터 시작해 봐요.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서 시의회로 가면 되잖아요.” 그들의 말은 현실적이고 타당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쌓은 당신 나름의 경험이라면 구의회에서도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을 겁니다.”

솔깃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의원이 아니라면, 차라리 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이들의 눈에서 의아함이 읽혔다. 왜 굳이 더 넓고 높은 곳을 향해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느냐는 의문일지도 모른다.

“구의원이 매력이 없어서입니까?”

재선을 앞둔 구의원의 물음에 나의 4년은 다른 이의 4년과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내게 기초의원이라는 계단이 야트막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내게 허락된 시간과 체력으로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구조적인 문제들을 구 단위의 조례 몇 개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의원이라는 자리는 구의원 ‘다음 단계’가 아니라, 도시 전체의 예산 흐름을 바꿀 만한 힘이자 장애인 정책의 근간을 바로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임계점’이라고 생각한다. 기초부터 밟고 올라가라는 말은 내게 사다리를 타듯 ‘시간을 거슬러 생존을 증명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평생 나 개인이 아닌, 내가 가진 장애를 증명해야만 겨우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 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 애초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어디 있기는 할까.

그래서 시의원은 나의 고집이자 오만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장애인 정책이 기초적인 생존 단계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시의회라는 공적인 언어와 힘으로 바꾸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대전은 2026년 현재 특별교통수단 법정 대수조차 못 맞춘 광역시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이동권이 곧 생존권임에도 강성 장애운동단체 외에 여느 장애인단체들은 뒷전에 선 모습을 본다.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는 장애인과 노인 개개인의 읍소와 민원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며, 오늘도 예측 불허한 시간을 기다림과 조바심으로 채우며 이동해야 하는 교통약자의 현실은 제대로 된 권리 해석과 응당한 정책이 절실하다.

이번 출마는 포기했다. 다시 안 올 기회일 것이다. 서류를 접으며 느꼈던 그 무거운 패배감에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다. 한정된 예산과 지원 체계 안에서 나조차도 국가와 지자체의 기본적인 물적·인적 지원을 포기해야만 의정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이 기형적인 시스템. 나는 그 시스템 속에서 ‘생존’이 아닌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기초 단위에서 광역으로 올라가는 ‘단계’를 밟을 시간과 여건조차 허락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더 높은 곳에서의 목소리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서류 더미 속에서 나를 가로막은 것은 단순히 복잡한 행정 절차만은 아니었다. 중증장애인이라는 신체적 조건 위에 얹힌 막대한 선거 비용과, 출마를 위해 감당해야 할 현실적인 기회비용들은 내게 ‘도전’이라는 단어 앞에 ‘포기’라는 이음표를 강제로 붙이게 했다.

정치는 누군가에게는 권력의 사다리일지 모르지만, 내게 정치는 약자라는 이름으로 숨죽여 살아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삶이 제도 안에서 숨통을 트고, 기득권자라는 이름으로 불통하던 이들에게 소통의 책임을 제시하며 합의점을 찾아주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동구를 넘어 대전 전역을, 또 다른 도시를 휠체어로 구른다.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혹은 복지의 틈새에서 여전히 보일락말락 한 손짓과 들릴락말락 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는 생각한다. 장애인이 경제적 생존을 담보로 잡히지 않고도, 누군가의 시혜가 아닌 자신의 권리로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세상은 언제쯤 올 것인가.

내 꿈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내가 굳이 ‘여성’이나 ‘중증장애인’이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아도, 경제적 부담이나 국가 지원의 상실을 고민하지 않는 곳이다. 당연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정치의 장이다. 언젠가 그 문턱이 낮아지고 우리가 밟아야 할 사다리가 부서지지 않는 세상이 오도록, 올라설 그곳에 사다리가 아닌 승강기가 마련되도록, 그때 그 자리가 어떤 자리가 되었든지 내 몫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구의원이 아닌 시의원을 선택했던 나의 고집은 결국 ‘기다릴 수 없었던 절박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언젠가 누군가 나처럼 똑같은 질문을 던질 때, 그때는 정말로 ‘사다리’가 되어줄 세상이 오길 바란다. 비록 이번에는 그 길을 멈췄지만, 내 아쉬움이 헛되지 않도록 나는 오늘 다시 내 자리에서 더 낮고, 더 넓게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장애학의 권위자인 영국의 톰 셰익스피어(Tom Shakespeare)는 연골무형성증 장애인으로서, 장애를 의학적 결함이 아닌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재정의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기존의 장애 정책이 단순히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똑같은 선에 세우는 것(평평한 운동장 만들기)에만 집중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든다고 해도 누군가는 휠체어를 타야 하고, 누군가는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운동장은 여전히 구조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논리다.

기울어진 곳은 평평하게, 평평한 곳에서도 공평한 기회와 평등이 주어지는 사회에서 남은 삶을 구르고 싶다, 데구루루.

[더인디고 THEINDIGO]

장애인권강사, 동료상담 및 사례상담가로 활동하였으며 2019년 대전 무장애 관광 가이드북(무장애대전여행)을 발간(5인 공저)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이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소속 직장내장애인인식개선교육과 활동지원사 및 근로지원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 실제 교육과 보수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5 Comments

함께여서좋아오ㅡ

음….다시 도전!!!! 구리고 다시 구르기….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아요~~~

좋아요~화이팅입니다!

공평에서 공정으로 나아가는 사회이길 바라봅니다

매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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