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표는 가능하지만 정치는 어려운 나라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이 국내에서 비준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다수 법률은 협약 기준과 충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에 2023년 12월 출범한 ‘CRPD 국내법 개정 연대’는 규범 반영 지표를 마련하고, 상충 법률의 제·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연대는 39개 법률을 분석·검토해 16건의 개정안을 발의했으며, 모자보건법, 상법, 최저임금법 등 주요 쟁점 법률을 중심으로 사회적 논의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장애인권리협약 채택 20주년을 맞아, 연대는 릴레이 기고를 통해 협약의 국내 적용 필요성과 향후 과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l 조태흥 한국장애인녹색재단 정책위원장
6·3 지방선거, UNCRPD 제29조 이행의 민낯을 묻는다

2026년 6월 3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열린다. 장애인 유권자에게 선거는 단순한 투표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이 사회의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대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UNCRPD) 제29조는 명확하다. 당사국은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조건으로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고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투표권은 물론, 피선거권, 공직 수행, 정당 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 영역에서의 완전한 참여가 이 조항의 요체다.
한국은 2008년 12월에 협약을 비준하였다. 그러나 비준 이후 18년이 지난 지금도 제29조가 요구하는 기준과 현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투표권: 여전히 ‘문턱‘을 넘지 못한다
올해 2월, 인천 지방선거 사전투표소 9곳이 장애인 접근이 불가능한 장소로 언론에 보도됐다(중부일보 기사). 선관위의 대응은 ‘임시 기표소 설치’였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패턴은 장애인의 투표권이 여전히 시혜적 배려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다. 법은 접근 가능한 투표소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현장은 해마다 ‘대체 장소를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위반을 반복한다.
더 깊은 문제는 발달장애인 유권자다. 공직선거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사이의 해석 충돌로 인해, 투표 보조 허용 여부가 투표소마다, 담당자마다 제각각이다. 같은 장애를 가진 유권자라도 어느 투표소를 방문하느냐에 따라 투표권 행사 여부가 엇갈리는 현실이고 이것은 권리의 자의적 운용이자 명백한 차별이다. UNCRPD가 요구하는 ‘합리적 편의 제공’의 의무는 이런 현장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피선거권: 설계 단계에서 이미 배제된다
특히, 정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6.3 지방선거 공천에서 여성 의무공천(30%), 청년 의무공천(광역 20%, 기초 30%)을 당규로 확정했다. 일부 시도당은 노동 분야까지 비례대표 제한경쟁 부문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장애인은 없다.
민주당 서울시당의 광역비례대표 공모는 여성·청년·노동을 제한경쟁 부문으로 설계해 당선 가능성이 높은 앞 순번을 사전에 배분했다. 장애인은 당선 가능성이 낮은 일반 부문에서 경쟁하도록 남겨졌다. ‘지원할 수 있으니 차별이 아니다’라는 논리는 궤변이다. 누구에게 앞 순번을 열어두는지가 곧 정치적 우선순위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국회와 지방의회에서 장애인 의원 비율은 여전히 1%대에 불과하다. 장애인구가 전체 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함에도, 의사결정 기구에서의 대표성은 사실상 부재하다.
장애계와 시민사회는 명백한 대표성 왜곡이라고 비판하지만, 정당들의 공천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공적 생활: 제도가 스스로 장벽이 된다
장애인의 공직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은 단지 공천 배제만이 아니다. 예비후보 단계부터 활동지원인 동반, 이동, 의사소통 보조 등에 드는 비용을 당사자가 전액 부담해야 한다. 비장애인 후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이 ‘장애 비용’은 피선거권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구조적 차별이다. 장애계는 이 비용에 대한 공적 지원을 요구해왔지만, 선거 관련 법제에 반영된 바 없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22년 한국 정부 심의 최종견해에서 제29조 관련 ‘선거권 및 피선거권 보장’을 명시적 권고사항으로 제시했다. 정부는 그 권고를 받고도 이번 선거 주기까지 실질적 제도 변화를 만들지 않았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첫째, 모든 투표소의 장애인 접근성을 법적 의무 사항으로 강제해야 한다. ‘임시 조치’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 발달장애인 등 의사소통 지원이 필요한 유권자에 대한 보조 기준을 공직선거법에 명문화하고, 선거 사무원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
둘째, 비례대표 당선권 내 장애인 의무 할당을 당헌·당규에 명문화해야 한다. 여성·청년·노동과 동일한 수준에서 장애인을 공천 구조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당선 가능 순번’에 배치하지 않는 할당은 수치만 채우는 형식에 불과하다.
셋째, 장애 당사자가 예비후보 등록 단계부터 활동지원인 동반, 이동 지원, 의사소통 보조 등 장애 관련 선거 비용을 공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공직선거법 및 정당법에 마련해야 한다.
넷째, 공천심사위원회에 장애 당사자 위원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키고, 공천 기준에 장애 인지적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 정책을 설계하는 자리에 당사자가 없다면, 그 정책은 결코 당사자의 현실을 담을 수 없다.
다섯째, 정부는 UNCRPD 제29조 이행 상황을 선거 주기마다 공개적으로 점검하고, 장애인 당사자 단체가 참여하는 독립적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비준국’이라는 명함만으로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유지할 수 없다.
6·3 지방선거는 단순한 지역 대표 선출 이벤트가 아니다. 이 사회가 장애인을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가를 가늠하는 척도다. 협약 비준 18년, 유엔의 권고 이후 4년, 정당의 공천 설계는 여전히 장애인을 ‘사후 배려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더 이상 선의에 기댄 배제를 관행으로 용납할 수 없다. 장애인의 정치참여는 복지가 아닌 권리이기 때문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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