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LG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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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제품 개선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이미지=제미나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제품 개선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이미지=제미나이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보이지 않는 눈과 오랜 시간 함께 살아가면서 나에게 탑재된 삶의 기술 중 하나는,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빠르게 내려놓는 것이다. 새롭게 출간된 책을 음성도서나 점자책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내게 주어진 역할이지만, 다른 이들과 같은 날짜에 따끈따끈한 신간을 받아볼 수 없다는 현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친구들과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갔을 때,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있더라도 재미있는 척 웃었던 것은 시각장애인인 내가 원활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장면 몇 개 정도는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판단이었다.

“모든 도서는 어떤 사람도 배제되는 일 없이 보편적 설계로 같은 시간에 출판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매번 투사의 마음으로 출판사와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이해하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기다리고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지일 때도 많았다. 영화 한 작품을 온전히 깊게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모든 장면을 동행한 친구에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의 감상에도, 우리의 관계에도 최선이 아님을 알기에 궁금해하지 않는 쪽을 택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집안을 가득 채운 모든 가전제품 대부분은 나와 같이 살고 있지만 그다지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점자 스티커를 붙이는 나름의 후작업을 하고 나면 정수기의 물을 컵에 담아 먹을 수 있었지만, 정확한 출수량을 조절하거나 물의 온도를 조정하는 세부 기능은 포기해야 했다.

에어컨을 틀고 온도를 올리거나 내릴 수는 있었지만, 버튼을 잘못 눌렀을 때 설정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스마트한 최신 기능들은 기기의 화면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맞출 수는 있었지만, VOD 서비스나 고급 기능은 내겐 또 다른 포기의 대상이었다.

소수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스마트폰과 AI가 보편화되면서 가전제품에 음성이 입혀지고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접근성도 개선되었다. 하지만 전보다 나아졌을 뿐 내가 내려놓아야 영역이 0이 되지는 않았다. 기기 개발자들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설계 단계가 아닌 제품의 완성 이후 시점에서 추가되는 접근성 기능들은 사용자의 편의를 높이는 것보다는 제조사의 이미지 마케팅을 위한 것처럼 보였다.

시각장애인을 위한다는 모토로 ‘말하는 인덕션’이 출시되었지만, 전면 터치 디스플레이는 여전히 내가 사용하기 어려웠고 접근성 메뉴가 추가된 텔레비전에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 그 메뉴로 들어갈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스마트 애플리케이션은 스크린 리더로 탐색할 수 없는 메뉴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조작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은 업데이트 이후 그래픽 디자인 때문에 조작 불가 상태로 변하기도 했다.

LG전자에서 ‘볼드무브 2기’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마냥 반갑고 설레지만은 않았던 것도 그동안의 경험이 결국 다시금 새로운 포기와 내려놓음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하고 참여자로 첫 모임에 갔던 것은 내 포기의 시간이 포기해도 괜찮음이 아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지만, 가격에 포함된 고급의 기능 대신 가장 단순한 기능만을 조작하고 있는 내겐 내려놓음의 마음과 함께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는 신념도 늘 공존했다.

처음 장소에 도착하고 3시간여의 모임을 마칠 때까지 LG에서는 어떤 제품도 보여주지 않았다. 사실 그게 좀 이상했다. 획기적인 제품을 내어놓고 소개하는 것으로 출발했던 다른 이벤트와는 달랐다. 조금 늦게 도착한 두 번째 모임에서 몇몇 제품들을 만져볼 기회가 있긴 했지만, 행사의 주된 프로그램은 아닌 듯했다. 7개의 조로 나누어진 우리에겐 기존 제품 사용의 불편함과 관련한 토론을 진행하라는 미션을 주었고 그 어려움을 개선할 새로운 제품을 구상해 보라는 과제가 놓여졌다.

개발자,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장애인 가족, 나이 지긋한 어르신으로 구성된 우리 조의 구성원들의 요구는 비슷한 듯 달랐지만 의견을 내는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듬뿍 담겨 있었다. 40여 명의 볼드무버들에겐 나와는 다른 각자의 내려놓음이 있었다. 새로운 제품을 구상해 보라는 LG의 제안에 우리는 그동안의 포기를 보상해 줄 희망 사항을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주최자와 운영진들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아이디어가 모두 실제 제품의 출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에 사용자의 의견을 하나하나 담아서 제조사에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신세계였다.

우리는 각자가 어려웠던 점을 발표하고 개선 방안을 제출한다. 회사는 실사용자의 사용상 불편함을 수집해 새롭게 출시될 기기에 반영한다. 각자의 의견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되고 모든 사용자의 편안함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바라던 건강한 제품 개발의 모델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듯 볼드무브 2기의 활동이 LG의 모든 제품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소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시작이 작더라도 큰 변화의 출발점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번 주엔 3번째 모임이 있다. 아직 나와 친하지 않은 우리 집의 전자제품들을 하나씩 만져보며 나의 내려놓음이 최소가 될 날을 기대해 본다. 멋진 프로그램을 기획한 LG전자와 무의에 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더인디고 THE INDGI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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