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RPD 20년 성과와 간극… “권리는 선언됐지만 삶은 여전”
- 폭력·돌봄·AI·대표성까지… 시민사회가 짚은 4대 의제
- 유엔 개혁·AI·기후위기·분쟁 속에서도 “시설·학대·폭력은 진행형”
- 참여를 넘어 대표성과 국제연대로, 다음 20년의 청사진 제시
[더인디고]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채택 20주년을 맞아 열린 제19차 당사국회의(COSP19)는 국제 장애인권이 현재 어디에 서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치열한 성찰의 장이었다.
한자리에 모인 세계 장애계는 지난 20년간 CRPD가 이뤄낸 역사적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권리는 선언됐지만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협약이 세계 각국의 법과 제도, 정책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음에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차별과 배제, 폭력과 빈곤이 반복되고 있다는 ‘이행의 간극’의 문제를 짚었고, 나아가 새롭게 확장되는 국제 의제를 논의 테이블에 올렸다.
특히 회의 하루 전 열린 ‘시민사회(CSO) 포럼’과 이후 라운드테이블 및 일반 토의에서는 “새로운 선언보다 실질적 이행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CRPD 20년의 성과와 과제 ▲착취·폭력·학대 ▲돌봄과 지원체계 ▲정치 참여와 대표성 등 네 가지 주제를 통해 구체화됐다.
■ CRPD 20년, “시혜에서 권리로… 그러나 모두에게 평등하지는 않았다”
참가자들은 CRPD가 장애를 복지나 시혜의 대상이 아닌 인권의 문제로 전환시킨 혁신적인 국제규범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CRPD 채택 이후 각국에서는 통합교육과 접근성 개선, 탈시설 정책, 장애인당사자단체(OPD)의 성장, 장애포용적 국제개발협력 확대 등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자기결정권’과 ‘의미 있는 참여’ 역시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원칙으로 자리 잡았고, 장애인권운동이 성장하는 데도 중요한 기반이 됐다.
그러나 성과가 모든 장애인과 모든 국가, 지역에서 동일하게 체감된 것은 아니었다. 발달장애인과 심리사회적 장애인, 장애 여성과 소녀, 장애청년, 난민과 원주민 장애인 등은 여전히 정책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대표되지 못하고 있으며, 교육과 고용, 사회참여에서도 구조적 배제를 경험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다음 20년의 과제는 새로운 권리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약속한 권리를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 유엔 개혁과 국제질서 변화… “더 강한 연대가 필요한 시기”
시민사회포럼에서는 CRPD 20주년과 함께 진행 중인 ‘UN80 Initiative’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이는 유엔 창설 80주년을 계기로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조직 혁신과 개혁 논의다.
참석자들은 재정 압박과 국제질서 재편, 전쟁과 분쟁의 장기화 속에서 다자주의 체계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동시에 기후위기와 팬데믹, 디지털 전환 등 초국경적 문제를 고려할 때 유엔과 국제협력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이 역시 국제회의에서 새로운 선언을 채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각국 정부와 시민사회, 장애인당사자단체가 협약 이행에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도 함께 강조됐다.
조성민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사무총장은 “국제사회의 약속이 현장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협약은 문서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 뒤, “유엔의 역할은 국가 간 연대와 책무성을 촉진하는 것인데, 최근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 속에서 그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위축되는 모양새”라며, “결국 변화를 만드는 주체는 당사국과 시민사회”라고 지적했다.
■ 거대 담론 아래 가려진 현실… 시설에서 사이버공간까지 이어지는 폭력과 학대
시민사회 참가자들은 협약 제정 이후에도 장애인이 여전히 구조적·사회문화적 폭력과 학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AI) 같은 거대한 글로벌 의제가 주목받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인권침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설 수용과 강제치료, 장애를 이유로 한 자유 박탈은 물론 일부 국가에서는 알비노를 대상으로 한 납치와 살해, 종교적 미신을 이유로 한 기도캠프 수용, 장애 여성과 원주민 장애인을 향한 성폭력과 젠더 기반 폭력 사례도 소개됐다.
디지털 공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사이버폭력과 온라인 혐오표현, AI 기반 차별은 새로운 형태의 구조적 폭력으로 등장했으며, 장애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참석자들은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라며 접근 가능한 사법체계와 피해자 중심 지원,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 확대를 촉구했다.
■ 돌봄은 시혜가 아닌 권리… 회복력 있는 사회의 조건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의 일상조차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구촌 곳곳의 분쟁과 팬데믹 등에 대한 현행 국가 대응 체계 수준만으로는 과연 온전한 회복력이 가능하겠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또한 국가는 ‘돌봄’ 중심의 회복력을 내세우지만, 이 역시 또 다른 장벽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동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위원장은 “한국만 해도 통합돌봄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제도의 성격과 정책당국의 관념에 ‘노인 중심’이 자리 잡고 있어, 상대적으로 장애인이 차별받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장애인은 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중증’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지체, 뇌병변’이 아닌 65세 미만 장애인은 통합돌봄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관련해 참석자들은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기존 접근에서 벗어나, 지원필요도 평가 역시 당사자의 선택과 자기결정권을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활동지원과 보조공학, 접근 가능한 주거와 교통, 포용적 의료서비스를 포함한 지역사회 지원체계를 마련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강도 높은 지원이 필요한 사람도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며, “다만, 돌봄을 가족, 특히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전가하는 구조 역시 개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참여에서 대표성으로”… 접근성과 리더십이 민주주의를 완성!
당사국 정부와 정당 등 권력기구가 마련한 장애인의 대표성 역시 ‘기만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참여와 대표성은 다르다”는 의미다. 회의에 참석하거나 의견을 제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장애인이 정책과 예산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장애청년과 심리사회적 장애인, 발달장애인 등은 주요 의사결정 구조에서 여전히 충분한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접근 가능한 정보 제공과 수어통역, 자막, 쉬운 정보(Easy Read), 선거 과정의 편의 제공 등 기본적인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민주적 참여 역시 형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함께 강조됐다.
그나마 투표와 의견 개진을 통한 참여는 일부 확대됐지만,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리더십과 대표성 확보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는 평가다.
이에 참석자들은 “Nothing About Us Without Us(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것은 없다)”를 넘어, 장애인이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정책 결정자이자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참여를 넘어 대표성으로, 대표성을 넘어 연대로”
이번 당사국회의가 전세계 장애인들에게 전한 가장 큰 메시지는 ‘새로운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 이행’이었다.
기후위기와 전쟁·분쟁, 디지털 전환과 AI 등 새로운 글로벌 의제가 부상하는 시대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시설 수용과 폭력, 학대, 접근성 부족, 차별과 빈곤 같은 기본적인 인권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거대한 담론과 일상의 인권침해를 함께 바라보며 대응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동시에 장애인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단순한 참여를 넘어 정책과 예산, 국제협력의 방향을 함께 결정하는 실질적인 대표성과 리더십이 필요하며, 국가와 시민사회, 장애인당사자단체가 국경을 넘어 협력하는 국제적 연대와 장애포용적 국제개발협력 역시 다음 20년의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결국 CRPD의 미래는 새로운 권리를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참여를 넘어 대표성으로, 대표성을 넘어 국제적 연대와 협력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협약의 약속은 장애인의 일상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
CRPD의 다음 20년은 새로운 약속과 변화의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되었는지를 놓고 평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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